며칠 전 나는 올리브영에서 선크림을 하나 사려다가, 매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골라서가 아니라, 고르지 못해서였다. 진열대에는 내가 이름을 아는 브랜드보다 모르는 브랜드가 훨씬 많았고, 그 낯선 이름들은 하나같이 잘 팔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촌스런 아저씨여서 공항 면세점에 있는 브랜드 정도가 익숙할 뿐이다. 그러니까 즉, 수십 년간 화장품이라고는 매번 같은 브랜드만 쓰던 나에겐 젊은 사람들로 가득찬 올리브영은 일종의 미지의 영역이었다.
앞 장에서 나는 옷을 만들지 않는 회사가 옷 시장을 쥐는 광경을 봤다. 화장대 위에서도, 거의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만 여기서는 그 뒤집힘이 훨씬 더 극적이다. 한때 누구도 넘볼 수 없던 성벽이, 불과 한 세대 만에 허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대체로 견고한 벽들을 봤다. 이번 이야기는 반례다. 벽이 얼마나 튼튼한지가 아니라, 벽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
두 개의 성
오랫동안 한국에서 화장품이라는 단어는 두 회사를 뜻했다.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이 둘의 벽은 세 개의 기둥으로 서 있었다. 오래 쌓은 브랜드, 백화점과 방문판매로 짜인 유통망, 그리고 직접 짓는 공장. 새로 화장품을 팔겠다는 사람은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넘어야 했으니, 사실상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이 구도는 수십 년간 흔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 벽도 앞의 벽들처럼 오래갈 거라 여겼다. 솔직히 말하면, 몇 년 전까지는 나도 그렇게 여겼다.
숫자가 뒤집힌 순간
그런데 2025년, 숫자가 조용히 뒤집혔다. 절대 강자의 한 축이 무너졌다.
| 회사 | 2025 매출 | 2025 영업이익 | 비고 |
|---|---|---|---|
| 아모레퍼시픽 | 4조 6,232억 (+8.5%) | 3,680억 (+47.6%) | 미국 등 서구권 성장으로 6년 만 최대 |
| LG생활건강 | 6조 3,555억 (-6.7%) | 1,707억 (-62.8%) | 순손실 858억 전자전환. 시총, 최고점의 7분의 1 |
| 에이피알 | 1조 5,273억 (+111%) | 3,654억 (+198%) | 화장품 시총 1위 |
| 구다이글로벌 | 1조 4,718억 (전년 약 4배) | 2,734억 (+98%) | 조선미녀·스킨1004 등 롤업 |
※ 2025년 연결 기준. LG생활건강은 화장품에 생활용품과 음료를 모두 합친 전사 매출이라, 화장품만의 규모는 이보다 작다.
표의 둘째 줄에는 설명이 조금 필요한 부분이 있다. 사실 LG생활건강의 6조 3,555억 원은 사실 화장품만의 숫자가 아니다. 이 회사는 화장품과 생활용품과 음료를 대략 3.5 대 3.5 대 3의 비율로 파는 회사다. 후(Whoo)를 팔고, 그 옆에서 페리오 치약과 엘라스틴 샴푸를 팔고, 코카콜라도 판다. 2025년에도 치약과 콜라는 조용히 성장했다. 무너진 것은 정확히 화장품이다. 뷰티 부문 매출은 2조 3,500억 원으로 한 해 만에 16.5%가 줄었고, 영업이익은 976억 원 적자로 돌아섰다. 면세점 물량을 스스로 줄이는 유통 정비,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중국 수요, 거기에 4분기의 희망퇴직 비용까지 겹치자 회사 전체의 연간 순이익도 858억 원 손실, 적자가 됐다. 성벽의 붕괴는 성 전체가 한꺼번에 내려앉는 게 아니라, 가장 화려하던 망루 하나가 먼저 무너지는 식으로 진행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름조차 낯설던 에이피알이 2025년 화장품 부문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두 성을 나란히 제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규모다. 에이피알의 매출은 아모레의 3분의 1에 불과한데, 영업이익은 거의 같았다. 매출이라는 과거의 잣대와 시가총액이라는 미래의 잣대가 정반대를 가리킨 셈이다.
에이피알이 무엇을 파는 회사인지는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간판은 메디큐브라는 브랜드인데, 파는 물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손바닥만 한 뷰티 디바이스다. 피부과의 고주파나 초음파 시술을 안방 화장대로 가져온다는 물건으로, 대표 기기인 부스터 프로는 이 한 모델로만 100만 대 넘게 팔렸다. 다른 하나는 그 기기와 세트로 쓰는 화장품이다. 기기로 피부의 흡수를 열어 두고 세럼과 콜라겐 마스크를 얹는, 말하자면 루틴을 통째로 파는 것이다. 2025년 매출을 뜯어 보면 화장품이 1조 원, 디바이스가 4,070억 원. 기기가 손님을 데려오고, 매일 쓰는 소모품이 매출을 쌓는 구조다. 그렇게 메디큐브 한 브랜드가 올린 매출이 1조 4,000억 원 - 회사 발표대로라면, 설화수도 후도 아닌 이 신흥이 이미 국내 화장품 브랜드 매출 1위다.
급성장의 비결은 세 가지가 겹쳐 있다.
첫째는 속도다. 틱톡에서 어떤 성분과 루틴이 뜨는지를 지켜보다가, 국내의 거대 ODM(제조자 개발생산, 주문한 회사의 이름을 달되 기획과 개발까지 공장이 맡는 방식) 공장들을 돌려 몇 달 만에 제품으로 만들어 낸다. 성벽을 허문 바로 그 외주 인프라를 가장 능란하게 쓰는 회사가 에이피알인 셈이다.
둘째는 파는 길이다. 백화점도 면세점도 거치지 않고 아마존과 틱톡샵에서 직접 판다. 지난해 해외 매출은 1조 2,258억 원으로 한 해 만에 세 배가 됐는데, 그 한복판에 미국이 있다. 뉴욕 타임스퀘어에 광고판을 걸고 LA에 팝업을 여는 물량 공세도, 직판 채널이라 곧장 매출로 회수된다.
셋째, 흉내 내기 어려운 것 하나는 자기 손에 남겨 뒀다. 화장품은 남의 공장에서 만들어도, 뷰티 디바이스만은 평택의 자체 공장에서 연 800만 대 규모로 찍는다. 누구나 크림을 만들 수 있게 된 시대에, 기기라는 문턱 하나를 자기 마당 안에 세워 둔 것이다.
에이피알과 함께 언급되는 구다이글로벌이라는 또 다른 신흥강자가 있다. 조선미녀라는 브랜드로 시작해 스킨1004, 티르티르, 라운드랩, 스킨푸드를 차례로 사들이며 한 해 매출 1조 5천억 원에 육박하는 몸집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매출에서 지금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건 원래의 ‘조선미녀’가 아니라 외부에서 인수한 브랜드 ‘스킨1004’다. 시작한 브랜드보다 사들인 브랜드들이 더 커진, 인수로 쌓아 올린 벽인 셈이다.
그리고 이 벽도 수출의 벽이다. 여덟 개 브랜드가 버는 돈의 약 90%가 해외에서 나온다. 조선미녀는 미국 세포라에서, 티르티르는 일본에서, 스킨1004는 동남아에서 각자 다른 대륙의 1등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롤업은 국내 브랜드 수집이 아니라, 대륙별로 이미 검증을 마친 수출 첨병들을 한 지붕 아래 모으는 일이었다.
그럼 그 첨병들을 모을 돈이 어디서 났는지가 이 이야기의 숨은 축이다. 씨앗은 조선미녀였다. 팬데믹 무렵 미국 아마존에서 ‘조선의 미인’이라는 낯선 이름을 단 쌀 선크림이 팔리기 시작했고, 이 브랜드 하나가 벌어들인 현금이 첫 인수의 밑천이 됐다. 그러나 밑천만으로 몇천억 원짜리 회사들을 연달아 살 수는 없다. 나머지는 남의 돈이었다. 구다이글로벌은 IMM 같은 사모펀드들을 상대로 8,000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했고, 증권사 인수금융을 그 위에 얹었다. 그렇게 티르티르의 남은 지분을 1,500억 원에, 스킨1004의 운영사를 2,456억 원에, 라운드랩의 서린컴퍼니를 6,000억 원대에 차례로 사들였다. 사모펀드들이 기꺼이 돈을 댄 이유는 단순하다. 이 회사가 상장하면 그 사채가 주식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벽은 아직 완성된 벽이 아니다. 상장이라는 마지막 벽돌을 남겨 둔 벽이고, 그 벽돌이 제때 놓이지 않으면 빌린 돈의 무게가 거꾸로 벽을 누르게 된다.
문턱을 없앤 사람들
이 벽은 왜 이렇게 빨리 무너졌을까. 답은 벽을 공격한 쪽이 아니라, 벽을 떠받치던 기둥 하나가 조용히 빠졌다는 데 있다. 제조라는 기둥이다.
지금 한국에는 코스맥스와 한국콜마라는 두 개의 거대한 화장품 공장이 있다. 이들은 자기 브랜드를 팔지 않는다. 대신 남의 브랜드를 대신 만들어 준다. 아이디어와 디자인만 가져오면, 크림이든 선크림이든 이 공장들이 완성품으로 찍어 준다. 이 순간, 화장품의 가장 높은 문턱이던 ‘공장’이 사라졌다. 공장 없이도 누구나 브랜드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앞 장의 무신사와 세아상역이 보여 준 그 구조, 곧 만드는 손과 파는 손의 분리가, 화장품에서는 아예 벽을 허무는 데까지 갔다.
그러자 벽 밖에서 수백 개의 작은 브랜드가 쏟아졌다. 조선미녀, 티르티르, 달바 같은 이름들이 ODM 공장을 빌려 제품을 만들고, 올리브영과 온라인으로 팔고, 일본과 미국으로 나갔다. 내가 매대 앞에서 이름을 몰라 서성였던 게 바로 이 브랜드들이다. 2025년 한국 화장품 수출은 사상 최대였는데, 그 주역은 두 개의 성이 아니라 이 작은 브랜드들이었다. 백화점과 방문판매라는 오래된 유통 기둥도 올리브영과 인터넷 앞에서 함께 흔들렸다. 벽의 세 기둥이 거의 동시에 빠진 셈이다.
같은 M&A, 다른 방향
신흥이 크는 방식도 둘로 갈린다. 에이피알은 자체 브랜드와 뷰티 디바이스로 한 우물을 깊게 팠고, 구다이글로벌은 잘나가는 브랜드를 사 모으며 몸집을 불렸다. 그런데 여기서 앞 장의 세아상역이 겹쳐 떠오른다. 그 회사의 지주 글로벌세아도 M&A로 몸집을 키웠다. 다만 방향이 정반대였다. 구다이글로벌은 본업인 화장품 ‘안에서’ 브랜드를 사 모아 성공했고, 글로벌세아는 본업인 옷 ‘밖으로’ 건설과 제지를 사들이다 휘청였다. 같은 인수합병인데, 자기가 값을 부를 수 있는 마당 안에서 하느냐 밖에서 하느냐가 운명을 갈랐다.
에이피알의 돈은 결이 또 다르다. 2014년 스물다섯의 김병훈이 에이프릴스킨이라는 화장품으로 창업한 이 회사는, 2021년 메디큐브의 홈 뷰티 디바이스로 방향을 틀었다. 피부과 기계를 안방으로 가져온다는 발상의 에이지알(AGE-R) 기기가 틱톡을 타고 미국에서 터졌고, 지금은 매출의 70% 이상이 해외에서 나온다. 백화점도 방판도 거치지 않고 자사몰과 아마존으로 직접 파니 남는 돈이 컸고, 그 현금으로 공장과 마케팅을 늘렸다. 2024년 초에는 코스피에 상장해 공모로 948억 원을 더 조달했다. 그러니까 에이피알의 벽은 판 돈으로 쌓은 벽이고, 구다이글로벌의 벽은 산 돈으로,그것도 상당 부분 빌려서 쌓은 벽이다. 같은 신흥이라도 벽돌의 출처가 다르고, 그 차이는 언젠가 벽이 흔들리는 날 드러날 것이다.
한때 아모레와 LG생활건강은 값을 자기 손으로 부를 수 있었다. 브랜드라는 이름값으로 웃돈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옆 매대에 ODM으로 만든 비슷한 크림이 절반 값에 놓이는 순간, 그 힘은 빠르게 증발했다. 값을 부르던 벽이, 값을 따라가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화장품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반례다. 벽은 영원하지 않다. 특히 그 벽의 문턱을 만들던 기술이 외주로 풀리는 순간, 벽은 놀랄 만큼 빠르게 낮아진다. 벽을 볼 때 높이만이 아니라, 그 벽에 달린 문과 문턱을 함께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너진 성벽 안의 사람들
무너지는 성과 새로 서는 벽의 차이는,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시간에도 새겨져 있다.
| 회사 | 직원수 | 평균 연봉 | 평균 근속 | 1인당 매출 | 1인당 영업이익 |
|---|---|---|---|---|---|
| ㈜아모레퍼시픽 | 4,748명 | 1억 226만원 | 13.7년 | 약 9.0억원 | 약 7,100만원 |
| LG생활건강 | 4,013명 | 8,757만원 | 15.1년 | 약 15.8억원 | 약 4,300만원 |
| 에이피알 | 657명 | 9,546만원 | 2.2년 | 약 23억원 | 약 5.6억원 |
| 구다이글로벌 | 189명* | 미공시 | 미공시 | 약 24억원 | 약 7.4억원 |
※ FY2025 기준 어림값. 아모레퍼시픽은 ㈜아모레퍼시픽(별도) 기준, LG생활건강은 연결 매출·영업이익을 본사 인원으로 나눈 값이라 자회사 몫이 섞여 있다. 에이피알 평균 연봉은 스톡옵션 행사이익이 포함된 공시 평균이다. *구다이글로벌은 별도 법인 기준 — 직원수 189명은 국민연금 가입자 수 기준이고(연결 전체 인원은 미공표), 1인당 값은 별도 매출 4,565억 원·영업이익 1,396억 원으로 계산했다. 연봉·근속은 미공시.
이 표에서 내 눈을 가장 오래 붙든 건 맨 아랫줄에 구다이글로벌이다. 연결 매출 1조 4,718억 원을 굴리는 회사의 본사 인원이 189명이다. 본사 장부만 따로 놓고 봐도 한 사람이 24억 원어치 장사를 하는 셈이다. 물론 이 숫자에는 단서가 붙는다. 1조 4,718억의 몸통은 본사 189명이 아니라, 사들인 브랜드 회사들, 티르티르와 스킨1004와 라운드랩의 사람들이 만든다. 그리고 크림을 젓고 병에 담는 손은 어차피 그 안에도 없다. 만드는 일은 ODM 공장이 하고, 회사는 브랜드와 계약만 쥔다. 그러니까 이 숫자들은 어떤 초인적인 생산성이 아니라, 브랜드 롤업이라는 사업의 본질을 보여 주는 값이다. 벽에서 공장이라는 기둥을 빼면, 회사에는 이름과 계약서만 남는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1조 5천억 원 가까운 돈이 굴러간다.
시간의 결도 뚜렷하게 갈린다. 성벽 쪽 사람들은 13년에서 15년을 머문다. 회사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떠나지 않았거나, 떠나지 못했다. 새로 지어진 벽 쪽 사람들은 2년 남짓 머문다. 회사가 뜨겁게 크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빠르게 드나든다. 어느 쪽의 시간이 더 나은 것인지, 나는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15년을 지킨 사람들의 회사는 1인당 7,100만 원과 4,300만 원을 남겼고, 2년을 머무는 사람들의 회사는 1인당 5억 6천만 원을 남겼다. 여덟 배쯤 되는 밀도의 차이. 무너진 성벽과 새 벽의 차이는, 결국 이 밀도의 차이이기도 하다.
다음에 올리브영에 가면 나는 또 낯선 이름들 앞에서 서성일 것이다. 그 이름들 중 몇 개는 십 년 뒤에도 남아 있을 것이고, 몇 개는 조용히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중 하나가 다음 세대의 성벽이 되어, 또 누군가에게 허물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벽의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가 혼자 세운 벽들의 이야기였다. 법으로, 습관으로, 시간으로, 때로는 무너지기까지 하며 각자 홀로 선 벽들. 그런데 벽을 세우는 데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혼자 세운 벽이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면, 여럿이 나란히 서서 함께 지키면 조금 더 오래갈까. 다음 이야기부터, 여럿이 함께 지키는 벽, 과점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