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화면 안에도, 아마 몇 개 들어 있을 것이다. 손톱보다 작고, 새까맣고, 그 안에 도시의 지도처럼 촘촘한 회로가 새겨진 물건. 반도체다. 우리는 그것을 직접 본 적이 거의 없다. 휴대폰 속에도, 자동차 속에도, 냉장고와 데이터센터 속에도 들어 있지만, 언제나 무언가의 안쪽에 숨어 있어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널리 쓰이면서, 가장 안 보이는 물건.
이 책을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나는 네 종류의 벽을 지나왔다. 법이 세운 벽, 자연이 세운 벽, 습관이 세운 벽, 그리고 몇몇이 암묵적으로 세운 벽. 마지막 벽은 그 어느 것 과도 다르다. 이 벽은 누가 세워 준 것이 아니다. 국가가 허락한 것도, 자연의 이치가 만든 것도, 우리 습관이 쌓은 것도 아니다. 오직 실력으로, 기술과 원가의 힘만으로 쌓아 올린 벽이다. 그리고 이 벽은, 세계에서 단 몇 곳만이 넘을 수 있다. 그 몇 곳 가운데 두 곳이 한국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돈으로도 넘지 못하는 벽
메모리 반도체, 그 중에서도 D램을 제대로 만드는 회사는 전 세계에 사실상 세 곳뿐이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의 마이크론. 이 좁은 명단은 십 년이 넘도록 거의 바뀌지 않았다. 앞의 이야기들 에서 진입장벽은 법이었고, 인프라였고, 습관이었다. 여기서 진입장벽은 그냥 실력이다. 그리고 실력이라는 벽은, 이상하게도 돈으로 넘기가 가장 어렵다.
중국은 지난 십 년간 반도체에 수십조원을 쏟아부었다. 나라가 작정하고 달려들면 못 할 게 없을 것 같은데, 메모리만큼은 좀처럼 따라잡지 못했다. 왜 그런지는, 이 물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면 조금 보인다.
먼저 전기라는 것부터. 전기는 알갱이의 흐름이다. 세상 모든 물질 안에는 전자라는, 더는 쪼갤 수 없이 작은 알갱이가 들어 있고, 그 알갱이들이 전선을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전기다. 알갱이 하나하나가 지닌 전기의 양을 전하라고 부른다. 물로 치면 전자는 물방울이고, 전하는 그 물의 양이다. 그리고 D램의 한 칸은, 이 물방울을 담아 두는 스위치 달린 우물이다. 우물에 전자를 담아 두면 1이고, 비어 있으면 0이다. 컴퓨터가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수백억 개의 우물에 물이 찼는지 말랐는지를 적어 두는 일이다.
문제는 이 우물이다. 손톱만 한 땅에 우물 수백억 개를 파야 하니, 하나하나는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그런데 담아야 할 물의 양은 줄일 수가 없다. 너무 적게 담으면, 찼는지 말랐는지 읽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입구는 좁아지는데 담을 양은 그대로라면, 길은 하나뿐이다. 아래로 파는 것. 그래서 우물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깊어졌고, 지금은 제 폭의 수십 배 깊이까지 내려간다. 사람으로 치면, 어깨너비의 구멍으로 백 층을 파 내려간 셈이다.
그런 우물 수백억 개를, 하나도 무너뜨리지 않고, 한 장의 웨이퍼에 판다. 그리고 그 웨이퍼는 완성까지 수백 개의 공정을 지난다. 한 공정의 성공률이 99.9%여도, 수백 번을 곱하면 살아남는 것은 얼마되지 않는다. 수율이라는 말의 정체가 이것이다. 어느 공정의 온도를 반 도 낮추고 어느 가스를 몇 초 더 흘릴지, 이 수백 개의 다이얼을 맞추는 조합은 설계도에 적혀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 적히지 않은 것들이, 이 챕터에서 다루는 벽의 진짜 벽돌이다.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세 겹으로 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맨 아래층은 데이터다. 팹은 웨이퍼 한 장을 만들 때마다 수천 개의 계기판 눈금을 기록하고, 어떤 조건의 웨이퍼가 살고 어떤 조건의 웨이퍼가 죽었는지가 수십 년치 서버에 쌓여 레시피가 된다. 실패를 버리지 않고 적어 온 회사만이 가진, 실패의 도서관.
그런데 그 레시피를 통째로 훔쳐 가도 소용이 없다는 게 두 번째 층이다. 같은 레시피도 다른 공장에서는 수율이 나오지 않는다. 장비마다 성격이 다르고, 앞 공정의 미세한 어긋남이 뒤 공정의 조건을 바꾸기 때문이다. 수율이 이유 없이 2% 빠진 날, 수백 개의 용의자 중 어디부터 의심할지를 아는 것. 그것은 이 공장에서 이 장비로 수천 번 사고를 겪어 본 엔지니어들의 집단에만 있다. 한 명의 달인이 아니라, “이거 몇 년 전 그 라인에서 봤던 패턴 아니냐”라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수천 명의 공유된 기억이다.
그리고 맨 위층은 관계다. 노광기와 소재를 대는 협력사의 기술자들이 팹에 붙어살다시피 하며 수십 년간 함께 다이얼을 돌려 온 이력. 장비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그 장비와 함께 보낸 시간은 계약서에 담기지 않는다. 이 세 겹 “실패의 도서관, 집단의 기억, 관계의 이력” 을 통틀어 업계는 그냥 “노하우”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통장에 돈이 많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은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시간을 쌓아 만든 벽은 시간으로만 넘을 수 있다.
다만, 시간은 중국에도 흐른다. 이 이야기는 조금 뒤에 다시 하겠다.
그래서 나는 이 벽을, 앞선 네 개 중 가장 정당한 벽이라고 생각한다. 강원랜드의 벽에는 도박이라는 그늘이, 통신 세 회사에는 암묵적 균형이라는 개운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 벽은 다르다. 세계를 상대로 정면으로 싸워, 더 잘 만들어서 이긴 벽이다. 미안해 할 것이 없는 독점.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벽은 앞의 어떤 벽보다도 무자비하다.
만년 2등이 1등을 넘어선 해
2025년, 이 벽 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이 세계의 1등은 삼성전자였다. SK하이닉스는 늘 그 뒤를 따르는 2등이었다. 반도체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순서는 계절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2025년, 그 순서가 뒤집혔다. SK하이닉스가 한 해 동안 벌어들인 영업이익은 47조 2천억 원. 삼성전자 회사 전체의 영업이익 43조 6천억 원을 넘어섰다. 스마트폰과 가전과 그 모든 것을 다 합친 삼성 전체보다, 메모리 하나로 버틴 하이닉스가 더 많이 남긴 것이다. 반도체끼리만 견주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삼성 반도체 부문의 이익은 24조 9천억 원. 하이닉스가 두 배 가까이 벌었다.
| 회사 | 매출 | 영업이익 | 2025년 한 줄 |
|---|---|---|---|
| 삼성전자 | 333조 6,059억원 | 43조 6,011억원 | 역대 최대 매출, 반도체(DS)가 견인 |
| SK하이닉스 | 97조 1,467억원 | 47조 2,063억원 | HBM으로 영업이익 국내 1위 |
※ 2025년 연결 재무제표 기준. 자료는 각 사 공시.
무엇이 이 역전을 만들었을까. 세 글자로 답할 수 있다. HBM이다. 인공지능이 폭발하면서, 엔비디아의 AI 칩 옆에 붙는 이 특수한 메모리, 곧 칩을 위로 여러 층 쌓아 데이터를 한꺼번에 많이 주고받게 만든 고대역폭 메모리의 수요가 하늘로 치솟았다. HBM은 발상부터가 곡예다. 평면의 땅이 모자라니 D램을 아파트처럼 8층, 12층으로 쌓아 올리고, 층과 층 사이를 실리콘 관통 전극이라는 수천 개의 미세한 구멍으로 꿰뚫어 연결한다. 쌀알에 구멍을 뚫는 세공을, 수천 번, 층마다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승부를 가른 것은 뜻밖에도 그 화려한 구멍이 아니라, 층 사이를 메우는 접착의 방식이었다. 얇게 깎인 칩들을 쌓으면 열에 휘고 뒤틀리는데, SK하이닉스는 층 사이에 보호재를 액체로 부어 굳히는 자기만의 공법을 다듬어 두었고, 필름을 눌러 붙이는 길을 택한 삼성은 발열과 수율에서 계속 발을 헛디뎠다. 수십 년 치 기술의 전쟁에서, 어느 쪽 풀을 쓰느냐가 왕좌를 갈랐다. 세계 HBM 열 개 중 여섯 개가 지금 하이닉스에서 나온다. 같은 벽 안에 있었지만, 새로 높아진 벽의 꼭대기에 먼저 오른 쪽은 만년 2등이었다.
그리고 2026년, 역전은 실적을 넘어 상징의 영역까지 갔다. 6월 어느 날,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이 삼성전자를 넘어 코스피 1위에 올랐다. 2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술의 벽은 가장 정당하지만, 벽 안에 있다고 해서 순위까지 지켜 주지는 않는다. 이 벽은 매 세대 새로 쌓아야 하고, 한 세대를 게을리하면 어제의 2등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벽을 다시 짓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 이 벽에는 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메모리라는 물건의 정체 자체가 바뀌는 중이다. D램은 원래 쌀 같은 상품이었다. 누가 만들어도 규격이 같고, 그래서 값으로만 경쟁하고, 그래서 시세가 폭등과 폭락을 오갔다. 그런데 올해 양산이 시작된 6세대 HBM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층층이 쌓인 D램의 맨 아래층, 전체를 지휘하는 베이스 다이가, 이제 메모리 공정이 아니라 시스템반도체의 공정으로 만들어진다.
하이닉스는 이 층을 대만 TSMC에 맡기기로 했고, 삼성은 자기 파운드리의 4나노 공정으로 직접 만든다. 기억 소자의 발 밑에 두뇌의 회로가 깔리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제 고객마다 다른 메모리를 만든다는 뜻이다.
엔비디아의 HBM과 다른 회사의 HBM이 속부터 달라지고, 실제로 거의 모든 큰 고객이 자기만의 주문을 넣고 있다. 쌀장사가 맞춤 양복점이 된 것이다. 맞춤 양복은 시세가 없다. 몇 년 전에 치수를 재고, 몇 년치 값을 미리 약속한다. 두 회사가 고객들과 몇 년짜리 계약서를 쌓을 수 있게 된 것도, “이번 호황은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절반은 이 기술적 변화 덕분이다. 다만 동전의 뒷면도 있다. 규격품의 시대에 메모리 회사는 누구에게나 팔 수 있었지만, 맞춤복의 시대에는 치수를 맡긴 고객에게 묶인다. 그리고 그 옷의 바닥 원단을, 하이닉스는 이제 대만에서 끊어 온다.
그러면 이 벽의 다음 층은 어떤 모양인가. 세 회사의 설계도를 훔쳐보면, 공통의 고민 하나가 보인다. 우물을 더 좁게 파는 길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회로가 가늘어질수록 그걸 새기는 노광 비용이 가파르게 치솟아서, 이제는 팔 수 있느냐가 아니라 파서 남느냐를 물어야 하는 지점에 왔다.
물리학보다 회계가 먼저 한계에 닿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 세대의 싸움은 좁게 파기가 아니라 다시 짓기다.
첫째, 우물의 배치를 갈아엎는다. 백 년 된 논의 구획을 정리하듯 셀 하나의 터를 직사각형에서 정사각형으로 줄이고, 눕혀 놓았던 스위치를 수직으로 세우고, 지상에 있던 관리 회로를 통째로 지하로 내려 보낸다. 두 회사 모두 올해 그 시제품을 내놓겠다는 목표다.
둘째, 그 다음에는 아예 우물을 눕혀서 쌓는다. 낸드플래시가 십여 년 전에 갔던 길, 평면이 모자라면 하늘로 가는 방식을 D램도 따라가는 것이고, 마이크론은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곧장 이 길로 가겠다고 벼른다. 셋째, 쌓는 접착의 방식도 바뀐다. 열 여섯 층, 스무 층의 HBM으로 가려면 층 사이의 돌기마저 사치가 되어, 구리와 구리를 맨살로 맞붙이는 기술이 대기 중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길의 끝에서, 방향은 하나로 모인다. 기억과 계산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 맨 아래층에 두뇌의 회로가 깔린 HBM은 그 시작일 뿐이고, 언젠가 메모리는 저장한 것을 그 자리에서 셈하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이 벽의 성격 하나가 다시 확인된다. 이 벽은 완성되는 법이 없다. 십 년 뒤의 벽은 지금의 벽과 재료부터 다를 것이고, 그 개축의 순간마다 순위표는 다시 백지가 된다. HBM이라는 새 층에서 만년 2등이 왕좌를 가져갔듯이. 세 회사가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낸 해에 다음 벽의 설계도부터 그리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백지에 대한 공포다.
모든 것이 한 줄에 꿰인 해
2026년의 반도체는 숫자의 감각이 무너지는 세계다. 그 무너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지난해 일 년 동안 번 것을, 올해는 한 분기에 번다.
삼성전자의 2분기 영업이익은 89조 원. 2025년 한 해 전체의 두 배를 석 달 만에 벌었고, 한 분기 기준으로 엔비디아보다 많이 벌었다. 하이닉스의 2분기 이익 전망치도 지난해 연간을 넘는다. 인공지능이 메모리를 빨아들이는 속도가 만드는 속도를 넘어서면서, 그 흔하던 범용 D램 값까지 한 분기에 60%씩 뛰었다. 조립 컴퓨터에 꽂는 램 하나가 석 달 만에 네 배가 됐다.
| 회사 (2025년, 연결) | 2025년 (확정) | 2026년 상반기 | 2026년 연간 (증권가 전망) |
|---|---|---|---|
| 삼성전자 | 43조 6천억원 | 약 146조원 (1분기 57.2조 확정 + 2분기 잠정 89.4조) | 약 360조원 |
| SK하이닉스 | 47조 2천억원 | 약 100조원 (1분기 37.6조 확정 + 2분기 전망 약 63조) | 약 230조원 |
*2025년은 각 사 확정 공시(2026년 1월), 상반기는 확정·잠정 발표와 증권사 추정, 연간은 증권사 전망치. 하이닉스 2분기 확정 실적은 7월 말 발표 예정이며, 표의 전망치들은 7월 중순 주가 급락 이전에 작성된 것이다.
표를 자세히 본 독자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2026년에는 삼성이 다시 앞선다. 그것도 크게. 역전의 재역전인데, 이것은 하이닉스가 무언가를 잘못해서가 아니다. 호황의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2025년이 HBM이라는 특등석의 해였다면, 2026년은 극장 전체가 만석이 된 해다. 인공지능의 식욕이 HBM을 넘어 그 흔한 범용 D램과 낸드까지 집어삼키자, 이제는 꼭대기에 먼저 오른 자가 아니라 자리를 많이 가진 자가 더 버는 국면이 왔다. 그리고 자리라면, 세계에서 삼성보다 많이 가진 회사가 없다. 삼성의 D램 생산능력은 하이닉스의 1.4배이고, 낸드는 격차가 더 크다. 게다가 한발 늦었다던 HBM에서도 삼성은 올해 2월부터 6세대 양산 출하를 시작하며 점유율을 조금씩 되찾는 중이다. 다만 장사의 밀도는 여전히 하이닉스 쪽이다. 이 회사는 지금 매출 100원에서 72원을 이익으로 남긴다. 제조업의 역사에서 좀처럼 본 적 없는 숫자다. 말하자면 삼성은 덩치로 벌고, 하이닉스는 밀도로 번다. 벽의 꼭대기는 아직 하이닉스의 자리지만, 벽 전체가 높아지자 몸집 큰 쪽의 그림자가 다시 길어진 것이다. 일 년 사이에 순위가 갔다가 되돌아오는 이 어지러움. 이것이 이 벽의 평상시 날씨다.
증권가의 숫자들은 전망이 현실을 따라잡지 못해서, 몇 달에 한 번씩 통째로 다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연초에 삼성의 올해 이익을 148조 원으로 적었던 증권사도, 170조 원으로 적었던 증권사도 있었다. 봄이 지나자 300조 원대로 고쳐 적은 곳이 둘이 됐다. 하이닉스도 연초 100조 원 언저리이던 전망이 여름에는 230조에서 260조가 되었다. 반년 만에 예언이 두 배 넘게 수정된 것이다. 내년 숫자로는 삼성 494조, 하이닉스 376조까지 적어 낸 곳도 있다.
물론 이것은 전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시차 하나를 적어 두어야 정직하다. 주가와는 상관없이 실적을 추정하는 사람들이 같은 숫자를 유지할지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방향 하나는 모두가 같았다. SK하이닉스는 올해 팔 물건을 연초에 다 팔았고, 오픈AI는 두 회사에 다달이 웨이퍼 90만장어치의 메모리가 필요하다는 계획을 내밀었는데, 이는 하이닉스가 지금 만들 수 있는 양의 두 배가 넘는다. 만드는 족족 팔리는 것을 넘어, 만들 수 없는 것까지 팔린 셈이다.
그런데 이 호황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서늘한 데가 있다. AI라는 기계는 기다란 사슬로 되어 있다. 엔비디아가 두뇌를 설계하면, 한국이 그 두뇌 옆에 붙는 기억을 만들고, 대만이 그 둘을 한 몸으로 조립하고, 그 완성품이 미국 어딘가의 데이터센터에 꽂혀 전기를 마신다. 설계, 기억, 조립, 전기. 이 네 고리 중 어느 하나만 막혀도 완성품은 나오지 않는다. 실제로 지금도 병목은 우리 메모리가 아니라 대만의 조립 공정과 미국의 전력망에서 생기고 있다. 우리 두 회사의 사상 최대 이익이란, 말하자면 이 사슬 전체가 무사히 돌아가고 있다는 전제 위에 놓인 숫자다. 다섯 개의 벽 중 가장 높은 벽이, 알고 보면 가장 많은 남에게 기대어 서 있다.
그 전제가 흔들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우리는 이번 여름에 예고편으로 봤다. 7월, 애플이 중국 창신메모리의 D램을 테스트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중국 내수용 아이폰에만, 그것도 협상 단계라는 조건이 붙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소식 하나에, 그리고 때마침 부풀어 있던 AI 거품론이 겹치면서, 두 회사의 주가는 하루에 10%씩 무너졌다. 삼 주 사이에 두 회사에서 증발한 시가총액이 1,200조 원. 하이닉스 한 해 매출의 열두 배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소문으로 사라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과민 반응이라고 말한다. 창신의 기술은 아직 두 세대쯤 뒤에 있고, 최신 회로를 새기는 데 필요한 노광 장비의 수출이 막혀 있어, 그 우물을 더 좁게 파는 길 자체가 봉쇄되어 있다. HBM은 그보다 훨씬 멀리 와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시장이 저토록 떤 이유는 따로 있다. 시간으로 쌓은 벽은 돈으로 못 넘지만, 중국은 돈과 시간을 둘 다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벽 위의 왕좌가 사슬 하나에 묶여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벽 위에서 내리는 돈비
이 광경을 숫자가 아니라 사람 쪽에서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 회사 | 평균 연봉 | 직원 수 | 평균 근속연수 |
|---|---|---|---|
| 삼성전자 | 약 1억 5,800만원 | 12만 9천명 | 약 13.7년 |
| SK하이닉스 | 약 1억 8,500만원 | 3만 5천명 | 약 13.4년 |
※ 2025년 기준. 자료는 각 사 공시.
2024년까지만 해도 평균 연봉은 삼성전자가 앞섰다. 그런데 2025년, 회사의 영업이익이 그랬듯 직원의 지갑에서도 순서가 뒤집혔다. SK하이닉스의 평균 연봉은 1억 8,500만 원. 한 해 만에 60%가 뛰며 삼성을 넘어섰다. 그리고 저 위의 표는 사실 의미가 없는 숫자일 수도 있다. 2026년은 타 기업과의 비교 정도를 넘어서는 수준이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성과급’ 이슈이다.
성과급이라는 돈에는 시차가 있다. 한 해의 실적이 이듬해 초의 통장에 찍힌다. 그러니 지금 이 벽 안의 사람들은 두 개의 숫자 사이에 서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이미 받은 돈. 올해 2월, 하이닉스 직원들은 2025년 실적의 몫으로 월 기본급의 2,964%, 기본급의 약 30개월 어치를 받았다. 재원 4조 7천억 원, 연봉 1억 기준 1억 5천만 원. 선심이 아니라 공식이다. 몇 해 전 노사가 “영업이익의 10%를 직원에게”라고 합의해 두었고, 거기에 영업이익 47조가 들어가서 기계적으로 나온 숫자다. 다른 하나는 2026년에 예정된 돈. 같은 공식에 올해 숫자를 넣어 보면 안다. 앞서 본 230조 원대의 전망대로라면, 내년 2월의 재원은 22조 원을 넘고, 3만 5천명으로 나누면 1인당 평균 6억에서 7억이라는 계산이 증권가에서 공공연히 나돈다. 성과급이, 한 번에, 서울 외곽 아파트 한 채 값이다. 세금으로 절반이 떼여도 그렇다.
삼성 반도체의 시계는 한 해 늦게 맞춰져 있다. 올해 받은 것은 지난해 실적의 성과급, 연봉의 47%로 전년의 세 배였다. 그런데 올해, 회사는 아예 하이닉스의 공식을 따라 새 성과급을 만들었다. 영업이익의 10.5%를 직원에게 지급하게 되는, 옆집 공식에 0.5%포인트를 얹은 숫자다. 그 첫 계산서가 나오는 게 내년 1월이고, 거기 들어가는 실적이 한 분기에 89조를 번 올해다. 사실 그 89조라는 숫자부터가 이미 직원들 몫을 치른 뒤의 것이다. 2분기 실적에는 새 성과급을 주려고 미리 떼어 둔 충당금 20조 원이 비용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걸 도로 더하면 한 분기 실질 이익은 100조를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향후 몇 년, 3만 5천명이, 아파트 한 채 값의 목돈을 쥔다. 그리고 이것은 하이닉스 한 회사의 이야기일 뿐이다. 기흥과 화성과 평택에는 삼성 반도체 부문의 7만 8천명이 있다. 하이닉스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고, 내년 1월부터는 이들의 통장에도 새 공식의 성과급이 찍히기 시작한다. 규모도 계산이 된다. 재원이 영업이익의 10.5%이니, 올해 이익 전망 300조대를 넣으면 30조 원 안팎. 실제로 회사는 2분기에만 이 돈을 주려고 20조 원을 미리 떼어 두었다. 7만 8천명으로 나누면 1인당 평균 4억 언저리라는 계산이 나온다. 하이닉스의 6억, 7억에는 못 미치지만, 사람이 두 배라 뿌려지는 돈의 총량은 오히려 삼성 쪽이 크다. 그러니까 내년 초, 경기 남부의 반도체 급여 생활자 11만명에게 예보되어 있는 돈은 두 회사를 합쳐 50조 원 안팎이다. 이런 돈이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모이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부동산이다.
그런데 그 돈이 흐른 곳이 재미있다. 하이닉스 공장은 이천과 청주에 있지만, 정작 이천 공장 앞 아파트는 3년째 값이 내리는 중이다. 돈은 공장 앞이 아니라 셔틀버스 노선을 따라 흘렀다. 하이닉스는 통근버스 5백 대로 매일 2만명을 실어 나르는데, 그 버스가 닿는 용인 수지와 분당의 학군지 아파트들이 뛰기 시작한 것이다. 삼성의 물길은 조금 다르다. 캠퍼스가 기흥과 화성과 평택이니, 돈은 동탄과 수원 영통과 평택 신축으로 흐른다. 회사는 달라도 문법은 같다. 공장이 아니라, 아이를 키울 동네다.
여기서 잠깐 계산을 해 보고 싶다. 하이닉스의 물길인 수지와 분당을 놓고서다. 이 동네의 사정이, 경제학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아서다. 먼저 덩치부터 재 보자. 수지구에 서 있는 아파트는 11만 채. 전국에서 아파트 비율이 가장 높은 동네다. 분당은 신도시가 처음 지어질 때 9만 7천 가구였다. 합쳐서 20만 채. 하이닉스 직원은 3만 5천명이니, 전원이 이사를 와도 이 동네의 6분의 1이다.
숫자만 보면 코끼리 앞의 생쥐다. 그런데 부동산이랑 특성을 적용하면 엄청난 가격 상승의 호재이다. 왜냐하면 가격은 서 있는 20만 채가 아니라, 그 해에 시장에 나오는 적은 물량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 해에 거래되는 것은 재고의 몇 퍼센트. 그리고 그 좁은 판에도 서열이 있어서, 값을 부르는 것은 언제나 가장 새것들이다.
성과급을 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줄을 서는 곳이 신축이고, 신축에서 찍힌 신고가가 옆 단지의 호가가 되고, 그 호가가 다시 옆의 옆 단지로 사다리를 타고 번진다. 시장 사람들은 이걸 키 맞추기라고 부른다. 그러니 3년간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가 873가구, 한 단지뿐이라는 사실은 이중으로 작동한다. 공급으로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물량이, 기준가로서는 20만 채 전체의 시세표가 되는 것이다. 새 아파트가 이 정도로 귀해지면, 그것은 더 이상 공급이 아니라 가격표다. 그리고 그 가격표 앞에 선 3만 5천명의 주머니에는, 올해 이미 4조 7천억이 들어왔고 내년에는 22조가 예보되어 있다. 올해 뿌려진 돈만으로 873가구를 세 번 살 수 있고, 예정대로면 열일곱 번이다. 두 회사의 성과급을 다 합치면 마흔 번에 가까워진다. 물론 50조가 전부 아파트로 오지는 않는다. 소득세도 고려해야 하고 심지어 삼성의 몫은 현금이 아니라 자기 회사 주식으로 지급되니, 아파트로 오려면 그 주식을 파는 한 단계를 더 거쳐야 한다. 다만 방향은 정해져 있다. 어느 길로 오든, 종착지는 결국 아이를 키울 동네다.
이 계산이 억지가 아니라는 증거를, 시장이 친절하게도 실험으로 보여 줬다. 반도체의 돈이 흐르는 두 물길 ‘하이닉스의 수지와 삼성의 동탄’ 의 올해 성적표다. 수지는 6.9% 올랐고, 동탄은 2.1% 올랐다. 비슷한 돈이 흘렀는데 결과가 세 배 차이 난다. 다른 것은 하나뿐이다. 수지와 분당은 새 아파트가 사실상 끊긴 닫힌 시장이고, 동탄은 아직 새 아파트가 들어오고 있는 열린 시장이라는 것. 동탄에서도 값을 리딩하는 것은 똑같이 신축이다. 셔틀 노선이 교차하는 역 앞의 새 단지는 한 달에 열한 번 신고가를 썼다. 다만 그 뒤로 새 아파트가 계속 입주하니, 신고가의 사다리가 위로만 뻗지 못하고 옆으로 눕는다. 밀려온 수요가, 닫힌 시장에서는 전부 가격이 되고, 열린 시장에서는 절반쯤 수량으로 새어 나간다. 공급이 움직이지 못하는 곳일수록 가격이 대신 움직인다는, 교과서 첫 장의 그 그래프가 경기 남부의 지도 위에 실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방금 동탄에 대해 ‘아직’이라고 썼다. 그 단어를 쓴 이유가 있다.
앞으로는 어떤가. 혹시 분양 예정 물량까지 다 긁어모으면 사정이 나아지는가. 그 반대다. 분당과 수지는 예정된 분양을 다 합쳐도 2029년까지 새 아파트가 1,400가구를 넘지 않는다. 그리고 열려 있던 동탄의 문이 닫히는 중이다. 신도시의 계획 물량이 바닥나면서, 동탄의 입주는 재작년 7천 세대에서 내년 5백 세대로 줄어든다. 저 실험에서 가격을 눌러 주던 새 아파트의 행렬이, 내년이면 끝나는 것이다.
여기에 반전이 하나 더 있다. 분당에서는 2027년부터 1기 신도시 재건축이 시작되는데, 재건축이란 먼 훗날의 공급이기 전에 당장의 철거다. 멀쩡히 사람이 살던 1만 2천 가구가 헐리고, 그 주민들이 인근 전월세 시장으로 쏟아진다. 그러니까 앞으로 몇 해간 이 동네는 새집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있던 집이 줄면서 수요는 늘어나는, 이중으로 잠긴 시장이 된다. 그래서 수지의 한 단지는 1년 만에 7억대에서 12억이 됐는데, 그 상승분에는 아직 내년의 50조가 반영되지 않았다. 시장이 지금 값을 매기고 있는 것은 내린 비가 아니라 예보다. 성과급은 공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 돈을 받은 사람이 아이를 키우고 싶은 동네의 집값을 올린다. 그리고 그곳은, 하필 집을 더 지을 수 없는 곳이다.
여기에 정책의 아이러니가 한 겹 더 얹힌다. 여러 채를 가지면 무거운 세금이 붙는 시대라, 돈은 이제 여러 채로 흩어지는 대신 가장 좋은 한 채로 응축된다. 똘똘한 한 채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대출에도 마개가 채워졌다. 집값의 몇 할이 아니라, 얼마짜리 집이든 6억까지라는 절대의 상한. 그런데 이 동네의 올해 성적표가 보여 주듯, 마개는 물을 막지 못했다. 상한이 걸러내는 것은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이고, 이 동네 집값은 빌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끼리의 경쟁에서 정해지기 때문이다. 남는 매수자가 물건보다 많은 한, 수요를 깎는 정책은 승자의 얼굴만 바꾼다. 잠긴 것은 수요가 아니라 공급 쪽 자물쇠인데, 열쇠는 자꾸 수요 쪽 자물쇠에 꽂히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오래전부터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신분의 언어였다. 그 언어가 이제 경기 남부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다만 사투리가 조금 다르다. 서울의 신분 지도가 강남까지의 거리로 그려졌다면, 이곳의 지도는 팹까지의 셔틀 노선으로 그려진다.
모두가 같은 해에 완공된다
그리고 이 장마는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두 회사는 용인에 도합 1천조원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고 있다. 규모를 실감하려면 지금의 생산능력과 견줘 보면 된다. SK하이닉스가 한 달에 만드는 D램은 웨이퍼 45만장분. 용인에 올라가는 팹 네 기가 다 돌아가면 여기에 70만장이 더해진다. 자기 몸집의 1.5배를 새로 짓는다. 삼성도 평택과 용인에 걸쳐 메모리 생산능력을 지금의 두 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이고, 용인 남사에는 파운드리 공장 여섯 기가 따로 올라간다. 원래 2040년대에나 끝날 일정이었는데, 정부와 회사가 손잡고 완공을 7년, 12년씩 앞당겼다. 세계 D램의 7할을 만드는 나라가, 그 생산능력을 십 년 안에 곱절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 옆에는 1만 6천 가구의 새 도시까지 계획되어 있다.
다만 여기에는 반도체의 가장 오래된 역설이 숨어 있다. 부족해서 짓는데, 다 지어지는 순간 부족이 끝난다는 것. 팹 하나가 서는 데는 몇 해가 걸리므로, 호황의 꼭대기에서 첫 삽을 뜬 공장들은 어김없이 잔치가 끝난 뒤에 완공되곤 했다. 2018년의 슈퍼사이클 뒤에 2019년의 폭락이 왔고, 2021년의 호황 뒤에 하이닉스가 분기마다 조 단위 적자를 내던 겨울이 왔다.
이번에는 다르다고들 한다. 맞춤 양복의 시대가 열려 몇 년치 계약서를 미리 썼고,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데도 고객들이 그걸로는 모자란다고 답한다니까. 정말 다를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의 성과급 장마와 수지의 집값은 “만드는 속도가 쓰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는데, 그 전제를 끝장내기 위해 두 회사가 1천조원을 쓰고 있다는 것. 중국의 창신도 몇 해 안에 마이크론을 제칠 만큼 공장을 늘리고 있다.
여기서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아파트에도 팹과 똑같은 역설이 있다는 것을. 부족의 정점에서 착공된 것들은, 부족이 끝날 무렵에 한꺼번에 완공된다. 2030년 언저리, 용인의 팹들이 차례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바로 그 무렵에, 분당의 재건축 1만 2천호가 입주를 시작하고 용인 플랫폼시티 1만 6천 가구가 들어선다. 메모리의 공급 곡선과 아파트의 공급 곡선이, 같은 해에, 같은 동네에서, 나란히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날의 메모리 값과 그날의 집값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벽 안의 사람들이 아파트를 사는 동안, 벽 밖에서는 그 벽을 낮출 공장들이 조용히 올라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 공급 효과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퀄리티 있는 도시 공간은 한계가 있고, 이제는 많은 이들이 이 경기남부벨트에 예비 수요자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벽을 지나와서
다섯 개의 벽을 다 지나왔다. 이제 조금 뒤로 물러서서, 그것들을 나란히 놓고 보고 싶다.
법이 세운 벽은 가장 편안하지만 유효기간이 있었다. 자연이 세운 벽은 경쟁자를 막아 주면서도 이익까지 지켜 주지는 않았다. 습관이 세운 벽은 가장 높아 보였지만 우리 손으로 허물 수 있는 것이었다. 몇몇이 세운 벽은 하나가 넘어지면 함께 기울었다. 그리고 기술이 세운 벽은 가장 정당했지만, 그 안에서 쉼 없이 순위가 뒤집혔고, 완성되는 법 없이 매 세대 다시 지어져야 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선 채로 가장 심하게 흔들렸다. 벽마다 성격이 다르고, 그래서 그 안에 사는 회사의 운명도, 그 벽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운명도 저마다 다르다.
어떤 회사가 독점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그 회사가 안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다섯 개의 벽을 지나온 지금, 나는 조금 다르게 묻게 된다. 저 벽은 누가 세웠는가. 법인가, 자연인가, 습관인가, 균형인가, 아니면 실력인가. 저 벽은 무엇에 기대어 서 있는가. 그리고 언제, 어떻게 무너지는가. 세운 자가 다르면 무너지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독점을 본다는 것은 결국, 그 벽의 출생 신고서와 유효기간을 함께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불은 여전히 스위치를 누르면 들어오고, 나는 내일 아침에도 노란 아이콘을 누를 것이다. 그 익숙한 풍경 뒤에 이렇게 서로 다른 다섯 개의 벽이 서 있다는 걸, 이 이야기를 쓰기 전의 나는 잘 몰랐다. 이제는 대리점 세 개가 나란히 선 거리를 지날 때도, 아침 출근길 파란 불꽃을 볼 때도, 그 뒤에 선 벽이 어렴풋이 보인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보이는 것만 조금 늘었다. 어쩌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건, 늘 그 정도의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