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났다. 돌아보면 꽤 먼 길이었다.
정선의 카지노에서 출발해, 새벽 보일러의 파란 불꽃을 지나고, 아침마다 누르는 노란 아이콘을 지나고, 편의점의 빵과 삼겹살집의 초록 병을 지났다. 옷장과 화장대를 들여다봤고, 설탕과 밀가루의 조용한 정기 모임을 엿들었고, 돈이 흐르는 배관을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사슬을 거슬러 올랐다. 반도체의 좁은 고리에서 발전소의 정비공을 만나고, 여수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고, 땅속의 광물까지 내려갔다가, 벽을 다 가지고도 무너진 그룹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제 짐을 정리할 시간이다. 그런데 가방을 열어 보니, 남은 것은 회사들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은 벌써 몇 개 잊었다. 점유율 숫자도 흐릿하다. 대신 손에 잡히는 것은 질문 몇 개다. 여행 내내 조금씩 깎이고 다듬어져서, 이제는 제법 도구의 모양을 하고 있는 질문들. 이 마지막 장은 그 도구상자를 여는 이야기다.
지나온 벽들의 지도
도구를 꺼내기 전에, 먼저 여행의 전반부를 잠깐 되짚어야겠다. 이 이야기는 벽의 다섯 가지 재료를 하나씩 확인하며 시작했으니까.
법이 세운 벽은 가장 편안했지만 유효기간이 있었다. 강원랜드의 벽에는 2045년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고, 그 벽 안의 회사는 20년 뒤를 위해 조용히 몸부림치고 있었다.
자연이 세운 벽은 경쟁자를 완벽하게 막아 주면서도 이익까지 지켜 주지는 않았다. 한전은 완벽한 독점 속에서 수십조 원을 잃었고, 그 적자는 우리가 겨울마다 느끼지 않아도 됐던 추위의 다른 이름이었다.
습관이 세운 벽은 가장 높아 보였지만 실은 가장 불안한 벽이었다. 우리가 매일 아침 쌓는 벽은, 우리가 어느 날 다른 아이콘을 누르는 것만으로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몇몇이 세운 균형의 벽은 하나가 흔들리면 함께 기울었고, 흔들림은 돌아가며 찾아왔다. 그리고 기술이 세운 벽은 가장 정당했지만, 그 안에서 쉼 없이 순위가 뒤집혔고, 완성되는 법 없이 매 세대 다시 지어져야 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선 채로 가장 심하게 흔들렸다.
여기까지가 여행의 전반부였다. 그 뒤로 나는 벽의 변주들을 봤다. 식탁 위의 벽, 여럿이 함께 지키는 벽, 안 보이는 벽, 그리고 사슬로 이어진 벽들. 다 지나온 지금, 그 모든 벽을 한 장의 지도로 접으면 이렇게 된다.
| 벽의 재료 | 대표 풍경 | 여행에서 확인한 날씨 |
|---|---|---|
| 법·제도 | 강원랜드 · 서울보증 · 주정 · 신용평가 | 맑음, 단 유효기간 있음. 거래소의 70년 벽은 두 달 만에 금 갔다 |
| 자연·인프라 | 한전 · 가스공사 | 벽은 견고하나 값을 못 정함. 흑자도 적자도 제 손 밖 |
| 습관·네트워크 | 카카오 · 네이버 · 참이슬 · 무신사 | 높지만 가벼움. 갱신하는 벽만 살아남는 중 |
| 균형(과점) | 통신 3사 · 설탕 · 밀가루 · 시멘트 | 마당이 마르면 담합도 무력, 마당이 필수재면 담합이 통함 |
| 시간·숙련 | 반도체 · HBM 본딩 · 발전 정비 · 고려아연 | 돈으로 못 사는 유일한 벽. 대신 매 세대 다시 쌓아야 함 |
| 브랜드·이름값 | 동서 · 삼립 · 건설 5대사 · 화장품 | 문턱이 외주로 풀리는 순간 한 세대 만에 붕괴 가능 |
| 사슬 전체 | 중앙그룹 | 고리를 다 가져도 좁은 고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음 |
이 지도를 오래 들여다보다가, 나는 결국 여섯 개의 질문을 추려냈다. 하나씩 꺼내 본다.
첫째. 이 벽은 누가 세웠나
벽의 출생 신고서를 묻는 질문이다. 어떤 회사가 독점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흔히 그 회사가 안전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세운 자가 다르면 무너지는 방식도 다르다.
법이 세운 벽은 법이 한 줄을 고쳐 쓰는 밤에 사라진다. 한국거래소의 70년이 그랬다. 자연이 세운 벽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대신, 그 안의 회사를 국가의 손에 붙들어 둔다. 습관이 세운 벽은 남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허문다. 그리고 시간이 세운 벽은, 세운 자 자신이 게을러지는 순간 어제의 2등에게 넘어간다. 만년 2등 하이닉스가 왕좌를 가져가던 해를 기억할 것이다.
법의 사촌 격인 규제가 세운 벽도 있었다. 보안 산업이 그랬다. 국가가 쳐 준 인증의 울타리 안에서 국산 보안은 아늑했지만, 2025년의 숱한 유출이 보여 주었듯 진짜 공격은 그 울타리를 지나 안방까지 들어왔다. 규제가 세운 벽은 세우기는 쉬워도, 규제가 풀리거나 빅테크가 방패를 공짜로 끼워 파는 순간 아늑함이 얇아진다. 아늑한 것과 강한 것은 다르다.
그러니 이 질문은 사실 이렇게 바꿔 물어도 된다. 이 벽은 어떻게 무너지게 되어 있는가. 출생 신고서에는 대개 사망의 방식까지 적혀 있다.
둘째. 문이 달렸나
완벽해 보이는 벽에도 대개 문이 있다. 수입품이라는 문, 대체재라는 문, 옆 앱이라는 문.
한국알콜은 국내 생산을 도맡고도 수입 용제라는 열린 문 때문에 값을 못 불렀고, 무신사의 벽에는 손가락 몇 번이면 건너갈 수 있는 문이 여럿 달려 있었다. 코리안리의 문은 처음부터 열려 있어 가장 값나가는 방들을 해외에 내주었고, 신용평가의 문은 면허로 잠겨 있었지만 해외의 거인들은 창문으로, 그러니까 지분으로 들어와 앉았다.
그리고 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벽도 하나 있었다. 예금보험공사. 대안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벽.
문의 유무와 개수와 열리는 방향. 벽의 높이보다 이것이 먼저다. 높이는 멀리서도 보이지만, 문은 가까이 가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높이만 보고 투자하고, 문을 보고 후회한다.
셋째. 문턱은 얼마나 높나
화장품이 가르쳐 준 질문이다.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의 성벽은 브랜드와 유통과 공장이라는 세 개의 문턱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제조자 개발생산을 맡는 회사들이 공장이라는 문턱을 대신 넘어 주기 시작하자, 성벽 전체가 한 세대 만에 내려앉았다. 크림 한 통 직접 만들지 않는 회사가 시가총액 1위에 오르고, 백육십 명이 1조 5천억 원을 굴리는 세상이 열렸다.
옷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루 250만 벌을 꿰매는 손은 값을 못 부르고, 옷 한 벌 만들지 않는 관문이 값을 쥐었다.
반대편에는 대신 넘어 줄 수 없는 문턱들이 있었다. 돌아가는 원자로를 만지는 손. 0.775밀리미터 안에 열여섯 층을 붙이는 장비. 광석에서 금속을 98.5%까지 긁어내는 공정. 이 문턱들의 공통점은, 돈이 아니라 시간으로만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턱을 볼 때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문턱을 누군가 대신 넘어 줄 수 있는가. 벽이 무너질 때는 대개 정면이 아니라 문턱부터 무너진다.
넷째. 벽 안의 마당은 자라고 있나
시멘트가 가장 비싸게 가르쳐 준 질문이다. 담합으로 값을 부를 힘까지 여러 번 증명한 과점이, 건설이 멈추자 34년 만의 최저 출하 앞에서 무력해졌다. 좀처럼 끄지 않는다는 소성로의 불이 하나둘 꺼졌다. 값을 불러도 살 사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반대로 밀가루와 전분당의 마당은 마르지 않는 필수재여서, 값을 함께 올리면 그 값이 고스란히 우리 장바구니로 내려왔다. 같은 담합이 한쪽에서는 무력했고 한쪽에서는 무서웠다. 차이는 벽이 아니라 마당에 있었다.
담배와 소주의 마당은 천천히 늙어 가고, 극장의 마당은 절반으로 접혔고, 데이터센터의 마당은 폭발하는 중이다. 벽은 마당보다 오래가지 못한다. 부동산에서든 사업에서든, 결국 우리가 사는 것은 벽이 아니라 마당의 미래다.
다섯째. 벽은 무엇에 기대어 서 있나
가장 높은 벽이 가장 많은 것에 기대어 있었다. 반도체의 왕좌는 대만의 조립과 미국의 전력망과 셋뿐인 손님에게 기대어 있었고, 그 전제가 흔들린다는 소문 하나에 3주 만에 1,200조 원이 증발하는 것을 우리는 봤다. 한미반도체의 71%는 지금 세대의 접합 기술과 손님 셋에 기대어 있었고, 그래서 세계를 지배하고도 값을 부르는 힘이 절반이었다.
배터리는 중국의 리튬에, 석유화학은 국제 시세에, 원자재는 아예 국가의 손에 기대어 있었다. 제약은 세계로 나가는 밸브를 빅파마에, 보안은 세계가 함께 쓰는 방패의 표준을 국경 밖에 기대고 있었다. 지키고 만드는 일은 국내에서 잘해도, 돈이 남는 원천은 자꾸 문밖에 있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벽은 언제나 사람에게 기댄다. 삼립의 벽은 공장의 손에 기대어 있었고, 그 손이 두 번 꺾인 해에 이익이 반 토막 났다. 정비 회사의 벽은 숙련공의 기억 그 자체였다.
벽을 볼 때는 벽 뒤를 봐야 한다. 그 벽이 넘어지는 날 함께 넘어지는 것들의 목록이 거기 있고, 그 목록의 맨 위에는 대개 사람이 있다.
여섯째. 마당은 어디로 움직이는가
이 질문은 여행의 후반에서야 생겼다. 마당은 자라거나 마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인다.
방산의 마당은 국내에서 세계로 넓어지며 40년의 을을 갑으로 만들었고, 그 소식은 실적보다 먼저 월급봉투에 도착했다. 배터리의 마당은 전기차에서 저장장치로 옮겨 가는 중이고, 회사들은 마당이 움직이는 쪽으로 서둘러 공장을 옮겨 짓는다. 전력 기자재의 마당은 인공지능이 통째로 새로 만들어 줬다. 수십 년 조연이던 변압기가 주연이 된 것은 변압기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마당이 그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다.
거래소는 이 질문의 씁쓸한 판본이다. 벽이 열린 해에 사상 최대로 벌었지만, 그것은 벽이 튼튼해서가 아니라 마당이 잠시 붐볐기 때문이었다. 착시는 가장 좋아 보일 때 가장 위험하다.
그러니 벽을 다 읽었다면, 마지막으로 바람의 방향을 봐야 한다. 같은 벽 안에서도, 마당이 다가오는 쪽에 선 회사와 멀어지는 쪽에 선 회사의 운명은 갈린다.
그리고, 잣대가 미끄러지는 곳
정직하게 적어 두자면, 이 여섯 개의 질문이 통하지 않는 벽도 하나 있었다. 예금보험공사. 값을 부르지도, 마당을 키우지도 않는, 오직 사람들이 은행 앞에 줄 서지 않게 하려고 서 있는 벽. 그 앞에서 나의 잣대들은 전부 미끄러졌고, 대신 다른 질문 하나가 남았다. 이 벽은 누구를 위해 서 있는가.
어쩌면 이것이 일곱째 질문일지도 모른다. 강원랜드의 벽은 폐광촌을 위해, 주정의 벽은 물가를 위해, 예보의 벽은 신뢰를 위해 서 있었다. 이윤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려고 세워진 벽들.
다만 나는 이 질문만은 도구상자에 넣지 않고, 주머니에 따로 넣어 두기로 했다. 도구라기보다 부적에 가까운 질문이라서다. 벽을 읽다가 길을 잃을 때, 이 질문을 꺼내면 대체로 방향이 보였다.
벽 안의 시간들
회사마다 나는 떠나지 않는 사람들을 헤아렸다. 처음에는 부록 같은 습관이었는데, 여행이 끝나고 보니 그 숫자들이야말로 이 책의 또 다른 지도였다. 벽의 나이와 체질은 어김없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에 찍혀 있었다.
| 벽 안의 시간 | 풍경 |
|---|---|
| 19년 · 18년 | KT와 하이트진로. 오래된 벽일수록 사람도 오래 남는다 (KT는 한때 22년, 2025년 분사·희망퇴직으로 줄었다) |
| 13년 안팎 | 반도체·거래소·상사. 견고한 벽의 표준 시간표 |
| 6년 · 2년 반 | 카카오와 무신사. 습관의 벽은 소비자만 가두고 만드는 사람은 못 가둔다 |
| 4년대 | 배터리 소재. 벽을 아직 쌓는 중인 산업의 시간표 |
| 1~2년 차의 이탈 | 신용평가. 벽은 견고한데 젊은 사람들이 먼저 벽 밖을 내다보는 곳 |
사람 단위로 쪼갠 돈의 지도도 있었다. 코리안리의 446명은 한 사람당 7억 원을 남겼고, 삼립의 3,149명은 한 사람당 1,200만 원을 남겼다. 제 연봉보다 작은 몫이다. 그런데 그 뒤집힌 숫자의 배후에는 안전에 들인 돈이 있었으니, 나는 그것을 나쁜 성적표로만 읽지 않기로 했다.
상사의 한 사람은 370억 원을 굴려 6억 원을 남겼고, 정비 회사의 한 사람은 1억 8천만 원어치의 시간을 팔았다. 돈이 남지 않는 자리에는 대신 사람이 오래 머물렀다. 어떤 산업의 본질은 재무제표가 아니라, 이 한 사람의 산수에서 더 정직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벽 위에서 내리는 비는 고르게 내리지 않았다. 반도체의 벽 안에서는 성과급이 아파트 한 채 값으로 내렸고, 그 비는 공장 앞이 아니라 셔틀버스 노선이 닿는 학군지에 고였다. 방산의 벽에서는 마당이 넓어지는 소식이 실적보다 먼저 월급봉투를 두껍게 했다.
반면 차화정의 벽에서는, 벽이 저무는데도 좋았던 시절의 연봉과 근속이 관성처럼 남아 있었다. 비가 그친 줄 모르고 우산을 쓰고 있는 풍경. 벽과 사람의 시차는, 이 책에서 가장 쓸쓸한 대목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있었다. 벽을 읽는 대신 벽을 세운 사람. 공고를 나와 밤에 대학을 다니며 발전소 현장을 기록하던 손이, 수십 년 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원전을 고치는 자리까지 간 것을 나는 보았다. 여섯 개의 질문은 벽을 읽는 도구지만, 그 사람은 도구 없이도 답을 살았다. 벽을 넘는 값은 돈이 아니라 시간으로 치른다던 서문의 문장이, 사람의 형태를 하면 그런 모습이었다.
계산대 앞에서
서문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오래 신어 발에 꼭 맞는 운동화 같은 자리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이라고. 그 소망이 회사의 규모로 커지면 벽이 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벽들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생각보다 자주 흔들리고, 어떤 것은 우리 손으로 쌓고 있으며, 어떤 것은 이미 조용히 무너지는 중이라는 것도.
서문에는 질문도 하나 있었다. 나는 어떤 벽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팔릴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사 줄 벽은 어디에 있는가.
여행을 마친 지금이라면 그 질문에 도구를 몇 개 보탤 수 있겠다. 나의 벽은 누가 세워 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시간으로 쌓은 것인가. 내 자리의 문턱을 누군가 대신 넘어 줄 수 있는가. 내가 선 마당은 자라는 쪽인가, 마르는 쪽인가, 그리고 어디로 움직이는 중인가.
회사를 읽던 질문들이 그대로 나를 읽는 질문이 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여행의 가장 실용적인 기념품인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에도 나는 편의점에 갈 것이다. 빵을 하나 집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설 것이다. 다만 이제 그 짧은 줄에서 가끔, 손에 든 물건을 뒤집어 보게 될 것 같다. 이 물건 뒤에는 어떤 벽이 서 있나. 누가 세웠고, 문은 달렸고, 문턱은 누가 지키고, 마당은 어디로 움직이고 있나.
답은 대체로 모를 것이다. 계산대의 줄은 짧고, 질문은 길다. 그래도 묻는 사람과 묻지 않는 사람의 세상은 아주 조금 다르다. 그 조금을 위해 이 긴 이야기를 썼다. 당신의 계산대 앞에도, 이 질문들이 한 번쯤 따라가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