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물병, 모니터 테두리, 마우스, 안경 다리. 지금 이 글을 읽는 자리에서도, 눈에 닿는 것의 절반쯤은 플라스틱일 것이다.
앞의 방산은 손님이 늘며 값을 되찾은 사슬이었다. 이번엔 정반대다. 손님이 세계에 널려 있는데도 값을 도무지 부르지 못하는 거대한 사슬이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플라스틱과 섬유와 고무가 여기서 나온다. 한때 자동차·화학·정유를 묶어 ‘차화정’이라 부르며 절대 지지 않을 것 같던, 한국 산업의 오랜 기둥. 석유화학이다.
범용품의 저주
사슬은 이렇다. 원유에서 뽑아낸 나프타(석유화학의 바탕이 되는 원료유)를 거대한 설비에서 잘게 쪼개면 에틸렌이라는 기초 물질이 나오고, 그 에틸렌이 온갖 플라스틱으로 뻗어 나간다. 한국은 이 나프타 분해 설비를 세계적 규모로 갖췄다. 규모만 보면 완벽한 벽이다. 그런데 이 벽은, 값을 못 부른다.
이유는 에틸렌이라는 물건의 성격에 있다. 이건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범용품이다. 브랜드도, 차별화도 없다. 그러니 값은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국제 시세가 정한다.
앞서 본 한국알콜의 용제가 국내 생산을 도맡고도 수입품에 값의 천장이 눌렸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석유화학은 정확히 같은 원리가, 수백 배의 규모로 벌어지는 곳이다. 아무리 큰 설비를 쥐어도, 옆에서 더 싸게 만들면 끝이다.
그 옆에 둘이 있다. 하나는 미국이다. 셰일 혁명으로 값싼 천연가스가 쏟아지자, 미국은 그 가스에서 바로 에틸렌을 뽑는다. 원유에서 나프타를 거쳐 만드는 한국보다 원가가 훨씬 낮다. 업계 사람들은 그 격차를 두고, 미국이 톤당 수백 달러에 만드는 것을 한국은 천 달러 안팎에 만든다고 말한다. 출발선부터 진 싸움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이다. 2010년대 후반까지도 한국에서 에틸렌을 사 가던 중국이, 몇 해 만에 더 크고 새로운 공장을 끝없이 지어 자급으로 돌아섰다. 지금 중국의 에틸렌 생산능력은 5,000만 톤을 넘어 세계 1위이고, 2025년부터 3년 사이 다시 2,500만 톤을 더 늘릴 계획이다.
한국 전체 생산능력이 1,300만 톤 남짓이다. 중국은 몇 해 만에 한국 전체 설비의 갑절에 가까운 공장을 새로 세우는 셈이다. 한국의 가장 큰 손님이, 어느새 가장 무서운 경쟁자가 됐다. 마당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값이 원료에서부터 진다
중국의 증설만이 아니다. 한국 석유화학은 그보다 더 깊은 곳, 원료에서부터 이미 지고 들어간다.
플라스틱의 기본이 되는 에틸렌을 뽑는 방법은 크게 둘이다. 원유에서 나온 나프타를 잘게 쪼개는 길과, 천연가스나 셰일가스에서 나온 에탄을 쪼개는 길. 그런데 에탄이 나프타보다 훨씬 싸다. 그래서 값싼 셰일가스가 넘치는 미국과, 가스가 땅에서 솟는 중동은 에탄으로 에틸렌을 만들어 원가를 확 낮춘다.
반면 한국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 에틸렌의 95%를 비싼 나프타로 만든다. 시작선이 다른 것이다. 남보다 비싼 원료로 만든 범용 플라스틱을 남보다 값싸게 파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에 중국의 대규모 증설까지 겹치니, 한국의 범용 석유화학은 위에서는 원료값에, 아래에서는 넘치는 물량에 양쪽으로 눌린다. 앞서 배터리가 위의 중국 광물과 아래의 완성차에 눌렸던 그 짓눌림이, 석유화학에서는 원료와 과잉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한국의 큰 회사들도 뒤늦게 원료 자체를 바꾸려 한다. 국내 대형 석유화학사들이 손잡고 미국산 에탄을 들여올 항만과 저장 설비를 짓고, 나프타 설비를 값싼 에탄으로 갈아타는 길을 여는 중이다. 다만 이건 몇 해가 걸리는 큰 공사이고, 그사이 범용의 겨울은 계속된다.
벽을 스스로 허무는 중
그 결과가 2025년의 풍경이다. 한국 석유화학은 지금, 자기 벽을 스스로 헐고 있다.
| 석유화학 구조조정 (2025~26) | 내용 |
|---|---|
| 정부 감축 목표 | 나프타 분해설비의 18~25% |
| 대산 1호 |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롯데케미칼, 110만 톤 감축 (2026년 2월 승인) |
| 여수 1호 | 여천NCC·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DL케미칼, 139만 톤 감축 (2026년 7월 승인) |
| 제도 | 사업재편 승인 + 금융·세제·R&D 7천억 원 이상 지원 |
가장 잘 만드는 회사가 가장 먼저 공장을 멈춘다. 생산능력 선두권 회사가 앞장서 설비를 세우고, 정부는 특별법까지 만들어 그 후퇴를 돕는다. 게다가 국내 설비 상당수는 이미 30~40년을 넘겨, 고쳐 쓰는 것 자체가 버거운 나이가 됐다. 정유 회사와 한 몸이 아니거나, 남들이 못 만드는 특수한 소재로 옮겨 가지 못한 공장들은 앞으로 십 년 안에 상당수가 사라질 것이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차화정의 아성이, 이렇게 저문다.
다만 그 후퇴가 그저 문을 닫는 것만은 아니다. 2026년 들어 감산은 실행 단계로 넘어갔다. 개별 회사가 각자 돌리던 나프타 분해설비를, 이제는 여러 회사가 한 법인으로 묶어 공동으로 운영하는 쪽으로 바꾸는 중이다.
대산에서는 그해 2월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롯데케미칼이 110만 톤을 세우기로 했다. 여수에서는 7월, 여천NCC와 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DL케미칼이 139만 톤 감축을 승인받았다. 롯데케미칼이 여수공장의 기초소재 사업을 떼어 여천NCC와 합치고, 나머지 둘은 다운스트림 사업을 현물출자해 세 회사가 새 법인의 지분을 3분의 1씩 나눠 갖는 구조다.
둘을 합치면 249만 톤이다. 정부가 목표한 감축량의 상당 부분을 이미 채운 셈이다. 원료와 물류와 전기를 함께 쓰고 남은 설비의 가동률을 끌어올려, 줄어든 몸집으로 원가만이라도 지켜 보자는 것이다. 어제까지 경쟁하던 회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한 지붕 아래로 들어가는, 드문 장면이다.
이 통합이 산뜻한 효율화가 아니라 벼랑 끝 생존이라는 건, 회사들의 장부가 말해 준다. 효성화학은 중국발 과잉에 자본잠식으로 몰려 주식 거래가 1년 넘게 정지됐다가, 특수가스 사업을 통째로 팔아 겨우 거래를 재개했다.
4년 연속 적자를 낸 롯데케미칼은 신용등급 전망이 깎이고 차입금이 10조 원을 넘기자, 파키스탄 자회사와 수처리 공장 같은 비핵심 자산을 하나씩 내다 팔고 있다. 여천NCC의 재무구조를 고치는 데도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5천억 원이 넘는 돈을 새로 넣어야 했다.
그마저 순탄하지 않다. 승인이 난 뒤에도 여천NCC 2공장을 언제 세울지를 두고 두 대주주의 셈이 엇갈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감산과 통합은 그래서 산뜻한 재편이라기보다, 더 버티지 못한 자들이 손을 맞잡거나 몸을 파는 쪽에 가깝다. 업계에서는 이 국면을 두고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의 큰 장이 열리는 변곡점이라 부른다. 앞으로 몇 해 안에, 이름을 잃거나 주인이 바뀌는 회사가 더 나올 것이다.
원유를 쥔 자가 내려온다
그런데 이 후퇴의 풍경에는,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들어오는 자들이 있다. 기존 석유화학사가 나프타를 사다 에틸렌을 만드는 회사라면, 이들은 원유나 그 부산물을 쥔 채 석유화학으로 내려온다. 정유사다.
값이 원료에서부터 진다면, 아예 그 원료를 쥔 자가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 계산으로 정유사들은 지난 몇 해 사이 석유화학에 큰돈을 부었다.
GS칼텍스는 2조 7천억 원을 들여 여수에 올레핀 생산시설을 세워 에틸렌 75만 톤을 뽑기 시작했다. HD현대오일뱅크는 롯데케미칼과 합작한 HD현대케미칼을 통해 대산에 3조 원짜리 중질유 기반 설비를 지어 에틸렌 85만 톤을 얹었다.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지오센트릭으로 플라스틱 재활용과 순환경제 쪽에 발을 넓힌다.
정유에서 나오는 값싼 부산물과 중질유를 석유화학 원료로 돌려, 나프타만 사다 쓰는 기존 석화사보다 원가에서 한 발 앞서겠다는 그림이다. 다만 이들도 결국 에틸렌이라는 범용을 만드는 이상 중국 과잉의 파도에서 자유롭지 않다. 실제로 대산의 HD현대케미칼도 지금은 감산 대열에 함께 서 있다.
그 흐름의 정점에 아람코가 있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 국영 석유회사, 원유 그 자체를 쥔 자다. 아람코는 국내 정유사 에쓰오일의 지분 63%를 쥔 대주주인데, 그 에쓰오일을 통해 울산에 국내 석유화학 역사상 최대인 9조 2,580억 원짜리 공장을 짓고 있다. 이름은 샤힌, 아랍어로 매다.
이 공장의 핵심은 원유를 정제 과정 없이 곧바로 화학제품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나프타를 거치지 않고 원유에서 바로 에틸렌으로 건너뛰니, 값이 지던 그 원료 단계를 통째로 접어 버리는 셈이다. 2026년 하반기 가동을 앞두고 있고, 다 돌아가면 한 해 에틸렌 180만 톤을 쏟아낸다. 한국 전체 생산능력의 7분의 1이 넘는 양이, 원유를 쥔 자의 손에서 새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석유화학의 재편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일어난다. 한쪽에서는 나프타를 사다 쓰던 기존 범용 설비가 문을 닫고, 다른 한쪽에서는 원유를 쥔 자가 더 낮은 원가로 새 설비를 세운다. 값이 원료에서부터 진다는 이 사슬의 명제를, 아람코는 반대편에서 증명한다. 원료를 쥐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다만 여기에도 그늘은 있다. 아무리 원가를 낮춰도 만드는 물건이 에틸렌이라는 범용인 한, 중국이 쏟아내는 과잉과 언젠가 정면으로 부딪친다. 원료를 쥔 자의 싸움조차, 결국은 범용의 저주 위에서 벌어진다.
그래도 살아남는 길
그렇다고 이 사슬 전체가 저무는 것은 아니다. 무너지는 건 정확히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범용의 자리다. 그 위로, 남이 쉽게 못 만드는 자리가 따로 있다.
배터리에 들어가는 전해액과 바인더, 분리막에 쓰이는 소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공정에 들어가는 정밀화학 물질. 이런 것들은 에틸렌처럼 국제 시세에 값이 눌리지 않는다. 만드는 회사가 몇 안 되고, 한번 품질을 인정받으면 사는 쪽이 쉽게 갈아탈 수 없기 때문이다. 값을 부르는 힘이, 범용에는 없고 여기에는 있다.
그래서 지금 한국 석유화학의 살길은, 범용 설비를 줄이는 만큼 이 고부가 소재로 무게를 옮기는 데 있다. LG화학이 양극재와 전해액 같은 배터리 소재로 제 몸을 바꿔 가는 것이, 앞서 본 배터리 편의 사슬과 정확히 맞물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부가 범용 설비의 4분의 1을 덜어 내라 압박하는 것도, 실은 그 빈자리를 소재로 채우라는 주문에 가깝다.
값을 못 부르는 범용을 접고, 값을 부를 수 있는 소재로 갈아타는 것. 이 책이 여러 사슬에서 되풀이해 만난 답이, 석유화학에서도 똑같이 나온다. 돈은 결국, 남들이 못 만드는 자리에서만 남는다.
장부가 가른다
이 통찰이 장부에 정말 찍히는지, 석유화학 생태계의 회사들을 2025년 성적표로 위에서 아래로 늘어놓아 본다. 이번엔 각 회사가 무엇으로 먹고사는지를 함께 적었다. 같은 화학사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어도, 돈이 어디서 남고 어디서 얇아지는지는 그 한 줄이 가른다.
| 회사 | 성격 | 무엇으로 사는가 | 매출 | 영업이익 | 이익률 | 순이익 |
|---|---|---|---|---|---|---|
| 유니드 | 니치 | 칼륨계 정밀화학(가성칼륨) 세계 1위 | 1조 3,388억 원 | 879억 원 | 6.6% | 653억 원 |
| 롯데정밀화학 | 스페셜티 | 염소·암모니아 정밀화학, 반도체·의약용 셀룰로스 | 1조 7,527억 원 | 744억 원 | 4.2% | 1,061억 원 |
| 금호석유화학 | 니치 | 합성고무 NB라텍스(고무장갑 원료) 세계 1위, 페놀·에폭시 | 6조 9,151억 원 | 2,718억 원 | 3.9% | 2,909억 원 |
| 국도화학 | 니치 | 에폭시 수지(도료·전자재료 접착) 국내 1위 | 1조 3,956억 원 | 532억 원 | 3.8% | 219억 원 |
| KPX케미칼 | 니치 | 폴리우레탄 원료 폴리올(스펀지·단열재 밑감) | 8,084억 원 | 274억 원 | 3.4% | 516억 원 |
| 효성티앤씨 | 스페셜티 | 스판덱스(신축성 섬유) 세계 1위 | 7조 6,948억 원 | 2,515억 원 | 3.3% | 382억 원 |
| 코오롱인더스트리 | 산업소재 | 타이어코드·아라미드(방탄복에 쓰는 초강력 섬유)·필름 | 4조 8,734억 원 | 1,089억 원 | 2.2% | 516억 원 |
| 송원산업 | 니치 | 폴리머 산화방지제(첨가제) 세계 2위 | 1조 392억 원 | 218억 원 | 2.1% | 23억 원 |
| 대한유화 | 범용 | PE·PP와 나프타 분해설비, 원가효율로 버티는 범용 | 3조 3,478억 원 | 527억 원 | 1.6% | 559억 원 |
| 애경케미칼 | 전환 중 | 가소제·바이오디젤·계면활성제 | 1조 4,523억 원 | -102억 원 | -0.7% | -49억 원 |
| LG화학 (별도) | 전환 중 | 범용 접고 배터리 양극재·전해액으로 | 18조 2,165억 원 | -2,105억 원 | -1.2% | 1조 3,680억 원* |
| OCI홀딩스 | 범용 | 폴리실리콘(태양광 패널 소재)·카본블랙·과산화수소 | 3조 3,801억 원 | -576억 원 | -1.7% | -1,462억 원 |
| 한화솔루션 | 범용 | PVC(파이프·창틀에 쓰는 플라스틱)·가성소다 + 태양광 | 13조 3,331억 원 | -3,648억 원 | -2.7% | -6,153억 원 |
| 롯데케미칼 | 범용 | 범용 나프타 분해설비 최대, 구조조정 1호 | 18조 4,830억 원 | -9,431억 원 | -5.1% | -2조 4,762억 원 |
| 효성화학 | 범용 | 스판덱스 원료 PP·DH, 특수가스는 팔았다 | 2조 3,407억 원 | -1,605억 원 | -6.9% | 3,260억 원* |
| SKC | 전환 중 | 필름 팔고 동박(배터리에 쓰는 얇은 구리막)·반도체 소재로 | 1조 8,400억 원 | -3,050억 원 | -16.6% | -7,194억 원 |
| 카프로 | 범용 | 카프로락탐(나일론 원료) 단일품목 | 246억 원 | -211억 원 | -85.7% | -324억 원 |
※ FY2025 기준. LG화학만 별도(연결엔 자회사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가 통째로 잡혀 화학 본업이 가려진다), 나머지는 연결. *표시한 두 회사의 순이익이 영업손실인데도 검은 것은, 공장이 번 것이 아니라 사업부·설비를 판 처분익에서 나온 일회성이다. OCI·한화솔루션·SKC의 실적엔 폴리실리콘·태양광·동박 등 화학 인접 사업이 함께 잡힌다.
표를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 경계가 선명하다. 흑자를 지킨 위쪽은 하나같이 범용 설비를 크게 두지 않았거나, 남이 쉽게 못 만드는 좁은 자리를 지킨 회사들이다. 유니드의 가성칼륨, 롯데정밀화학의 정밀 셀룰로스, 금호석유화학의 NB라텍스, 효성티앤씨의 스판덱스, 코오롱인더스트리의 타이어코드와 아라미드, 송원산업의 산화방지제. 이익률은 대개 2~6%로 결코 두껍지 않지만, 적어도 팔수록 손해는 아니다. 값이 눌리지 않는 자리를 하나씩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색이 붉어진다. 롯데케미칼과 한화솔루션의 범용 설비와 PVC, 효성화학의 스판덱스 원료, OCI의 폴리실리콘.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범용의 자리에 선 회사들이 나란히 손실을 적었다.
매출 18조 원의 롯데케미칼이 한 해에 2조 4천억 원을 잃고, 매출 1조 8천억 원의 SKC는 매출의 6분의 1에 가까운 돈을 영업에서 날렸다. 규모는 방패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큰 범용 설비를 쥔 회사일수록 더 크게 잃는다.
반대편 극단에는 카프로가 있다. 나일론 원료인 카프로락탐 하나에 매달렸던 이 회사는 중국의 과잉 공급 앞에서 매출이 한 해 수백억 원대로 쪼그라들며 사실상 무너졌다. 좁은 품목이라도 그것이 범용이면, 중국이 값싸게 쏟아내는 순간 자리 자체가 사라진다.
예외가 하나 있다. 대한유화는 순수 범용 PE·PP를 만드는데도 흑자 언저리를 지킨다. 스페셜티가 아니라 원가효율, 곧 오래된 설비를 고장 없이 알뜰하게 돌리는 힘 하나로 버틴 경우다. 다만 이건 벽이 아니라 조심스러운 줄타기여서, 시황이 한 번 더 꺾이면 가장 먼저 흔들릴 자리이기도 하다. 범용에서 흑자를 내는 건 가능하지만, 그 흑자는 늘 얇고 늘 불안하다.
마지막으로 눈속임 하나를 짚어 둔다. LG화학과 효성화학은 영업에서 손실을 내고도 순이익 칸이 검다. 그 검음은 공장이 번 것이 아니다. LG화학은 자회사 배당과 사업부 정리에서, 효성화학은 특수가스 사업을 통째로 판 처분익에서 나온 일회성이다.
장부의 맨 아랫줄이 검다고 공장이 돈을 버는 건 아니다. 오히려 팔 것을 팔아 한 해를 넘겼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이 두 회사의 진짜 얼굴은 순이익이 아니라 그 위 영업이익 칸에 있고, 거기엔 붉은 글씨가 앉아 있다. 살아남는 길이 스페셜티라는 이 사슬의 답은, 장부의 어느 줄을 읽느냐까지 바꿔 놓는다.
여담이지만, 여수의 밤을 본 적이 있다. 산업단지의 불빛이 바다 위로 끝없이 이어져서, 사람들은 그걸 야경이라 부르며 사진을 찍는다. 그 불빛의 정체는 대부분 밤에도 멈추지 못하는 공장들이다. 한번 세우면 다시 데우는 데 며칠씩 걸리는 설비들이라, 불이 꺼지지 않는 게 아니라 끄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그 불빛 가운데 일부가 앞으로 몇 년에 걸쳐 하나씩 꺼질 것이다. 야경은 조금 어두워질 것이고, 그걸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석유화학은 이 책의 시금석을 가장 거대한 규모로 증명한다. 점유율도, 설비의 크기도, 값을 부르는 힘을 보장하지 못한다. 세계에서 손꼽히게 많이 만드는 나라가, 정작 그 값 앞에서는 무력하다. 규모가 곧 벽이라는 흔한 믿음을, 이 거인은 자기 몸으로 배반한다.
전환의 배신, 그리고 무기가 된 범용
답이 그렇게 간단하면 좋겠다. 값 안 나오는 범용은 접고, 스페셜티나 유망 산업으로 갈아타면 된다고. 실제로 많은 회사가 그 길을 택했다. LG화학은 양극재로, SKC는 동박으로, 롯데케미칼은 동박 자회사로.
그런데 하필 그 배터리가 전기차 캐즘을 맞았다. 앞의 장부에서 SKC가 매출의 6분의 1을 영업에서 날린 그 붉은 숫자가, 바로 범용을 피해 도망친 자리에서 났다. 범용의 한파를 피해 뛰어든 곳이, 또 다른 겨울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배터리 소재도 결국 대량으로 찍어 내는 넓은 고리이고, 그 자리는 이미 중국이 쥐고 있다. 범용에서 도망쳐 간 곳이 하필 중국이 값을 누르는 또 다른 범용이었던 것이다. 유망해 보이는 산업으로 갈아타는 것만으로는, 남이 대체 못 하는 좁은 고리에 서지 못하면 결국 같은 함정에 빠진다.
그렇다고 범용을 깨끗이 버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여기 무서운 역설이 하나 있다.
2021년, 한국은 요소수 대란을 겪었다. 요소는 값싼 범용 화학제품이라, 우리는 진작에 국내 생산을 접고 값싼 중국산에 열의 아홉을 기댔다. 그런데 중국이 자국 사정으로 요소 수출을 조이자, 화물차와 디젤차 수백만 대가 멈출 위기에 놓였다. 값이 안 나온다고 버린 범용이, 상대의 손에서 무기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범용이라도 나라에 꼭 필요한 기초소재라면, 값만 보고 완전히 버리는 순간 목줄을 상대에게 넘기는 셈이 된다.
그래서 석유화학의 진짜 답은 다 접기도, 다 갈아타기도 아니다. 남이 대체할 수 없는 좁은 고리로 값을 지키되, 값이 안 나오는 범용이라도 나라의 목줄이 될 만한 것은 최소한의 자급을 남겨 두는 것. 수익성과 안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다. 값의 논리로만 보면 다 접는 게 맞지만, 세상이 값의 논리로만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 거인은 가장 비싼 수업료로 배우는 중이다.
좋은 시절에 맞춰진 시간표
이 사슬을 사람 단위로 쪼개 보면, 회사의 성적표만으로는 안 보이던 결이 하나 더 드러난다.
| 회사 | 직원수 | 평균 연봉 | 평균 근속 | 1인당 매출 | 1인당 영업이익 |
|---|---|---|---|---|---|
| 롯데정밀화학 | 943명 | 약 1억 1,970만 원 | 16.8년 | 약 18.6억 원 | 약 7,890만 원 |
| 금호석유화학 | 1,606명 | 약 1억 350만 원 | 13.1년 | 약 43.1억 원 | 약 1.7억 원 |
| 유니드 | 472명 | 약 1억 1,600만 원 | 14.4년 | 약 28.4억 원 | 약 1.9억 원 |
| 효성티앤씨 | 2,532명 | 약 7,760만 원 | 14.4년 | 약 30.4억 원 | 약 9,930만 원 |
| KPX케미칼 | 275명 | 약 8,000만 원 | – | 약 29.4억 원 | 약 1억 원 |
| 대한유화 | 866명 | 약 9,590만 원 | 13.2년 | 약 38.7억 원 | 약 6,090만 원 |
| 국도화학 | 873명 | 약 8,000만 원 | 9.5년 | 약 16.0억 원 | 약 6,100만 원 |
| 송원산업 | 612명 | 약 1억 470만 원 | 15.8년 | 약 17.0억 원 | 약 3,560만 원 |
| 코오롱인더스트리 | 4,260명 | 약 7,810만 원 | 11.7년 | 약 11.4억 원 | 약 2,560만 원 |
| 애경케미칼 | 716명 | 약 6,900만 원 | – | 약 20.3억 원 | 약 -1,400만 원 |
| LG화학 (별도) | 12,869명 | 약 1억 700만 원 | 14.0년 | 약 14.2억 원 | 약 -1,600만 원 |
| 한화솔루션 | 5,503명 | 약 8,840만 원 | 10.3년 | 약 24.2억 원 | 약 -6,630만 원 |
| 효성화학 | 1,768명 | 약 9,260만 원 | 14.2년 | 약 13.2억 원 | 약 -9,080만 원 |
| 롯데케미칼 | 4,349명 | 약 9,860만 원 | 14.6년 | 약 42.5억 원 | 약 -2.2억 원 |
| 카프로 | 93명 | 약 6,300만 원 | 8.0년 | 약 2.6억 원 | 약 -2.3억 원 |
| OCI홀딩스 | 67명 | 약 1억 4,330만 원 | 3.9년 | – | – |
| SKC | 172명 | 약 1억 640만 원 | 9.3년 | – | – |
※ 직원수·평균 연봉·평균 근속은 DART 사업보고서(2025년)의 직원 현황을 남녀 가중평균한 값이다. 1인당 매출·영업이익은 FY2025 실적을 공시 직원수로 나눈 어림값이며, 적자는 1인당 손실을 그대로 적었다. LG화학은 연결에 자회사 배터리가 통째로 잡히므로 별도 기준으로 계산했고, 나머지는 연결 실적을 썼다. OCI홀딩스와 SKC는 지주·투자 회사 체제라 공시 인원이 본사에 몰려 있어 1인당 수치가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진다. 그래서 두 회사의 1인당 칸은 비워 두었다. 근속 미공시는 빈칸으로 둔다.
1인당 매출 42억 원. 이 책에서 사람 단위로 쪼갠 숫자 가운데 가장 큰 축에 드는 값이다. 롯데케미칼의 한 사람은 상사원 못지않은 돈을 굴린다.
그런데 그 42억 원의 끝에서, 한 사람당 2억 원이 넘는 손실이 남는다. 그리고 연봉 1억 원 언저리와 근속 15년에 가까운 시간은, 흑자였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이 어긋남을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좋았던 시절에 맞춰진 임금과 시간의 구조는, 시절이 바뀌어도 한동안 관성으로 굴러가는 법이다. 차화정의 황혼은 감산 발표나 특별법 같은 큰 활자보다, 이런 시간표의 어긋남에 먼저 찍히는지도 모른다.
근속 15년의 사람들은 좋은 시절의 절반과 나쁜 시절의 절반을 다 지나왔을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보낼 15년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이제 이 여행의 마지막 정거장으로 간다. 지금까지 사슬을 거슬러 오를 때마다, 돈은 자꾸 더 위로, 더 상류로 흘러갔다. 배터리에서는 중국의 리튬으로, 석유화학에서는 미국의 가스로. 그 흐름을 끝까지 따라가면 결국 한 곳에 다다른다. 사슬의 맨 밑바닥, 땅에서 캐내는 광물과 원자재의 세계다. 다음 여행은, 그 원자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