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의 맨 아래에 닿았다. 상류에서 설계와 소재와 장비를 봤고, 중류에서 그것들이 칩이 되는 파운드리와 메모리를 봤다. 이제 그 칩을 인공지능용으로 쌓고, 붙이고, 검사하고, 포장하는 자리 바로 후공정, 하류다. 흔히 반도체의 꽃은 앞단이라고들 하지만, 돈이 가장 많이 남는 고리 하나가 바로 이 맨 끝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고리 곁에는, 이름도 낯선 소부장(소재·부품·장비) 회사가 잔뜩 붙어 있다.
가장 좁은 고리 - 본딩
인공지능 반도체의 진짜 병목은, 뜻밖에도 설계도나 웨이퍼가 아니라 맨 마지막 조립에 있다. HBM은 D램(기억을 담는 메모리 칩)을 아파트처럼 열여섯 층까지 쌓아 올린 것인데, 국제 규격은 그 아파트의 전체 높이를 0.775밀리미터로 정해 두었다. 손톱 두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그 틈에 바닥 칩과 열여섯 층을 다 욱여넣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삐뚤게 붙거나 열에 뒤틀리면 그 비싼 반도체는 통째로 불량이 된다. 이 붙이는 공정을 본딩이라 하고, 그 장비를 TC본더라 한다. 그리고 이 장비 시장에서 한 회사의 이름이 압도적으로 크다. 한미반도체다. 전 세계 본딩 장비의 70%를 쥐고, 2025년 영업이익률이 43%에 이른다.
여기서 이 사슬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세계를 지배하는 고리를 쥐고도, 한미반도체의 고객은 딱 셋뿐이다. HBM을 만드는 회사가 세계에 SK하이닉스, 삼성, 마이크론 셋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작은 벽의 역설이라 부른다. 벽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데, 그 벽 앞을 지나갈 손님이 몇 없어서 값을 부르는 힘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 회사가 납품가를 세게 올리겠다고 나서자, 가장 큰 손님인 SK하이닉스가 움직였다. 오래 한미반도체 장비만 쓰던 데서 벗어나 2024년부터 한화세미텍(옛 한화정밀기계에서 분사한, 연 매출 4천억 원대의 한화 계열 장비사)을 두 번째 공급사로 들이며 주문을 나누기 시작했다. 세계 70%를 쥔 한미와 새 도전자 한화세미텍은 급기야 서로 TC본더 특허를 침해했다며 맞소송까지 벌였다. 손님이 셋뿐인 시장에서 그중 가장 큰 손님이 대안을 키우자, 독점에 가깝던 회사도 값을 마음껏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층을 더 높이 쌓으려면 구리와 구리를 직접 맞붙이는 다른 본딩 기술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분야에서는 유럽과 미국이 앞서 있다. 2026년 첫 분기, 세대가 바뀌는 길목에서 주문이 잠깐 끊기자 이 회사의 분기 영업이익은 한 해 전보다 88%가 빠졌다. 좁은 고리에 이익이 남는다는 말은, 그 고리가 자리를 지키는 동안에만 참이다.
이 도전자들의 이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 두자. 지금 세대의 TC본더, 열과 압력으로 칩을 눌러 붙이는 지금의 방식 에서 한미반도체는 세계 71%를 쥐고 있지만, 싱가포르의 ASMPT가 30% 안팎으로 뒤를 바짝 쫓는다. 이 회사는 2025년 HBM4용 TC본더를 복수로 수주하며 SK하이닉스 물량 일부를 가져갈 유력 후보로 떠올랐고, 여기에 한화세미텍까지 가세해 한미의 아성을 흔든다.
그런데 진짜 벽은 그다음 세대에 있다. HBM을 20단, 24단으로 더 높이 쌓으려면 지금처럼 칩 사이에 미세한 땜납 돌기(범프)를 끼우는 방식으로는 한계에 부딪힌다. 그 대안이 범프를 아예 없애고 구리와 구리를 거울처럼 갈아 맨살로 직접 붙이는 하이브리드 본딩이다. 문제는 이 기술을 네덜란드 베시(Besi)와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그리고 ASMPT가 앞서 쥐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반도체가 지금 세대의 벽은 지켜도, 세대가 바뀌는 그 길목에서 이 거인들과 다시 겨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좁은 고리가 버는 돈은, 다음 세대 기술에서도 같은 자리를 지킬 때만 이어진다.
본딩만이 아니다 - 그 옆에 붙은 회사들
그런데 하류를 본딩 하나로만 보면 절반만 보는 것이다. 칩을 다 만든 뒤에도 긴 뒷공정이 이어진다. 그것을 기판(칩을 얹어 바깥과 전기를 잇는 판)에 얹고(패키징), 외주로 조립·검사하고(OSAT), 제대로 작동하는지 하나하나 찔러 본다(테스트). 그 마디마다 소부장 회사가 붙어 있다. 그 대표들을 2025년 성적표로 나란히 놓으면, 같은 후공정 안에서도 이익이 얼마나 다르게 남는지가 드러난다.
표에는 또 낯선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상류 편에서 그랬듯, 무엇을 하는 곳인지 한 줄씩 미리 짚어 둔다. 리노공업과 ISC는 다 만든 칩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사할 때 칩의 수백 개 다리에 살짝 대 보는 접촉 부품을 만든다. 리노공업은 가느다란 금속 핀으로, ISC는 말랑한 실리콘 고무 소켓으로 대는데, 검사할 때마다 닳는 소모품이라 칩을 찍어 내는 한 꾸준히 팔린다.
테크윙은 그 검사기 안에서 칩 수천 개를 자동으로 집어 옮기고 골라내는 기계, 핸들러를 만든다. 하나마이크론과 SFA반도체는 남이 만든 칩을 받아 대신 조립하고 포장해 준다. 이런 외주 조립을 OSAT라 부른다. 해성디에스는 칩을 얹어 바깥으로 다리를 빼 주는 금속 판, 곧 리드프레임을 만든다. 대덕전자는 칩과 메인보드를 잇는 인쇄회로기판을 만든다. 이름은 낯설어도, 세상의 모든 칩은 이 뒷마당을 한 번씩 거쳐야 비로소 기계 속으로 들어간다.
다만 이 검사 부품들이 꽂히는 검사기 본체, 곧 칩에 수만 가지 신호를 넣어 합격과 불량을 판정하는 테스터 자체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 값비싼 장비는 일본 어드반테스트와 미국 테라다인이 세계를 양분하고, 국내는 엑시콘·유니테스트가 메모리용 테스터에서 그 틈새를 파고든다. 한국이 쥔 것은 그 검사기에 딸린 핀과 소켓과 핸들러 같은 소모품 고리이지, 검사기 그 자체는 아닌 셈이다.
| 후공정 고리 | 대표사 | 살아남는 포지셔닝 | 매출 | 영업이익 | 영업 이익률 | 순이익 |
|---|---|---|---|---|---|---|
| 본딩 장비 | 한미반도체 | HBM용 TC본더 세계 70%, 아무도 못 대신한다 | 5,767억 | 2,514억 | 43.6% | 2,140억 |
| 테스트 핀·소켓 | 리노공업 | 정밀 테스트 핀 소모품, 대체 난이도 최고 | 3,725억 | 1,770억 | 47.5% | 1,520억 |
| 테스트 소켓 | ISC | 실리콘러버 소켓 니치 | 2,202억 | 601억 | 27.3% | 563억 |
| 테스트 핸들러 | 테크윙 |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 HBM 검사 수요 | 1,591억 | 158억 | 9.9% | 90억 |
| OSAT | 하나마이크론 | 외주 조립·패키징, 물량으로 버틴다 | 1조 5,344억 | 1,277억 | 8.3% | 656억 |
| 기판·리드프레임 | 해성디에스 | 리드프레임·패키지기판 | 6,534억 | 465억 | 7.1% | 238억 |
| 인쇄회로기판 | 대덕전자 | 반도체 기판(FCBGA) 전환 중 | 1조 653억 | 491억 | 4.6% | 476억 |
| OSAT | SFA반도체 | 남의 칩 대신 조립, 값이 안 고인다 | 3,674억 | -196억 | -5.3% | -191억 |
※ FY2025 기준. 리노공업은 별도, 나머지는 연결. 한미반도체는 DART 연결 실제값(매출 5,767억·영업이익 2,514억)이다.
표를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 같은 후공정 안에서도 이익이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게 보인다. 맨 위, 본딩 장비(한미반도체 43%)와 테스트 핀(리노공업 47.5%)에 이익이 무섭게 남는다. 특히 리노공업은 반도체를 검사할 때 칩에 살짝 대는 가느다란 핀을 만드는 회사인데, 그 핀은 남이 쉽게 흉내 내지 못하는 정밀 소모품이라 이익이 이렇게 두껍다. 반대로 맨 아래, 남의 칩을 받아 대신 조립해 주는 OSAT(SFA반도체)는 아예 적자다. 시키는 대로 조립하는 자리에는 돈이 남지 않는다. 사슬의 맨 끝, 후공정이라는 좁은 골목 안에서도 값은 다시 한번 가장 좁고 대체 불가능한 고리에만 남는 것이다.
이 그림을 세계로 넓히면 한국의 자리가 더 또렷해진다. 남의 칩을 대신 조립·검사하는 OSAT 시장의 세계 1위는 대만 ASE로, 상위 열 곳 매출의 절반가량을 혼자 가져간다. 그 뒤를 미국 앰코(Amkor)와 중국 JCET가 잇는데, 앞의 표에 나온 하나마이크론은 이 세계 순위에서 여덟 번째, 점유율 2% 남짓의 작은 회사다.
즉 한국은 조립·패키징이라는 덩치 큰 자리에서는 세계의 변방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칩의 진짜 병목이 된 첨단 패키징 즉, 그래픽칩과 HBM을 한 판에 얹어 붙이는, 2편에서 본 그 CoWoS 마저 대만 TSMC가 사실상 독점하고 ASE가 그 생산능력을 키운다. 한국이 후공정에서 이익을 남게 하는 자리는, 결국 본딩 장비와 테스트 핀 같은 좁고 대체 불가능한 소모품 고리 몇 곳뿐이다. 덩치로 버티는 자리는 남의 것이고, 돈이 남는 좁은 자리만 한국의 것인 셈이다.
첨단 패키징이라는 말이 자꾸 나오니 한 번 풀어 두자. 옛날의 패키징은 다 만든 칩을 플라스틱으로 감싸고 다리를 붙이는 단순한 포장이었다. 그런데 회로를 더 좁게 파는 일이 한계에 다다르자, 이제는 여러 개의 칩을 한 덩어리로 촘촘히 붙이는 것 자체가 성능을 좌우하게 됐다.
그 방식이 크게 둘이다. 하나는 여러 칩을 실리콘으로 만든 얇은 중간 받침판(인터포저) 위에 나란히 올려 짧고 굵은 배선으로 잇는 2.5D인데, 엔비디아 그래픽칩과 HBM을 한 몸으로 붙이는 TSMC의 CoWoS가 바로 이것이다.
다른 하나는 칩을 아예 위로 겹겹이 쌓는 3D다. 여기에 하나 더, 예전엔 큰 칩 하나로 만들던 것을 작은 조각(칩렛)으로 나눠 따로 만든 뒤 다시 붙이는 흐름이 겹친다. 커질 대로 커진 인공지능 칩을 흠 하나 없는 웨이퍼 한 장으로 뽑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지자, 잘게 나눠 만들고 잘 붙이는 쪽이 답이 된 것이다. 그래서 붙이고 쌓는 이 후공정의 솜씨가, 회로를 좁게 파는 상류의 솜씨만큼이나 중요해졌다.
| 회사 | 직원수 | 평균 연봉 | 평균 근속 | 1인당 매출 | 1인당 영업이익 |
|---|---|---|---|---|---|
| 한미반도체 | 737명 | 약 6,530만 | 9.7년 | 약 7.8억 | 약 3.4억 |
| 리노공업 | 677명 | 약 1억 1,700만 | 9.3년 | 약 5.5억 | 약 2.6억 |
| ISC | 407명 | 약 6,330만 | 9.0년 | 약 5.4억 | 약 1.5억 |
| 하나마이크론 | 771명 | 약 6,290만 | 7.8년 | 약 19.9억 | 약 1.7억 |
| 해성디에스 | 1,354명 | 약 7,940만 | 6.2년 | 약 4.8억 | 약 0.3억 |
| 대덕전자 | 2,633명 | 약 8,150만 | 9.8년 | 약 4.0억 | 약 0.2억 |
| 테크윙 | 589명 | 약 5,810만 | 6.9년 | 약 2.7억 | 약 0.3억 |
| SFA반도체 | 584명 | 약 5,790만 | 8.2년 | 약 6.3억 | 약 -0.3억 |
※ 실적은 FY2025(리노공업 별도, 나머지 연결), 직원·연봉·근속은 각 사 2025년 사업보고서(별도, 남녀 가중평균). 1인당은 연결 실적을 별도 인원으로 나눈 어림값이라, 해외 자회사가 큰 하나마이크론은 과대 계상된다.
사람 쪽 숫자를 보면 이야기가 더 선명해진다. 돈이 가장 많이 남는 리노공업의 평균 연봉이 1억 1,700만 원으로, 이 표에서 가장 높다. 좁은 고리를 쥐면 회사만이 아니라 그 안의 사람에게도 돈이 흘러든다. 반면 남의 지시대로 조립하는 회사들의 봉투는 5천만 원대에 머문다. 앞서 상류 편에서 돈이 얇은 설계·장비 회사의 사람들이 얇은 봉투를 받았듯, 하류에서도 돈이 남는 자리와 사람의 봉투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가장 좁고 대체 불가능한 고리를 쥔 곳에서만, 회사도 사람도 많이 남긴다.
그리고 이 후공정에는 지금 막 새 자리가 하나 열리는 중이다. 반도체를 얹는 바닥판을, 오래 쓰던 플라스틱 대신 유리로 만드는 유리기판이다. 에스케이씨의 자회사 앱솔릭스가 미국 조지아에 세계 첫 양산 공장을 짓고, 에이엠디·아마존·인텔의 품질 인증을 받는 중이다. 인공지능 칩처럼 크고 뜨거운 칩을 더 평평하고 촘촘하게 앉힐 수 있어, 차세대 패키징의 판을 바꿀 후보로 꼽힌다. 값이 어디에 고일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이 사슬에 몇 안 되는 새 고리다.
이 새 고리를 누가 먼저 쥘지를 두고 벌써 경주가 붙었다. 앱솔릭스는 실은 에스케이씨와 미국 장비 거인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의 합작사로, 2024년 조지아에 세계 첫 유리기판 양산 공장을 세운 선두 주자다. 다만 뜻밖의 검증 항목이 늘면서 양산 시점이 2025년 말에서 2026년으로 밀렸다. 그 뒤를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판 업체인 삼성전기가 쫓는데, 세종에 시범 라인을 깔고 2026~2027년 양산을 노린다. 여기에 칩을 만드는 인텔까지 자기 손으로 유리기판 시제품을 내놓으며 뛰어들었고, AMD는 앱솔릭스를 포함한 여러 곳의 샘플을 시험하는 중이다. 만드는 쪽도 쓰는 쪽도 아직 표준을 정하지 못했고, 첫 상업 양산에 누가 먼저 도달하느냐가 이 새 고리의 주인을 가를 참이다.
이 모든 사슬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인가
여기까지, 나는 반도체 사슬을 위에서 아래까지 다 걸었다. 상류의 설계와 소재와 장비, 중류의 파운드리와 메모리, 하류의 본딩과 후공정. 그런데 걸음을 멈추고 보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이 거대한 사슬은 결국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삐 돌아가는가. 답은 하나다. 인공지능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2026년 여름의 자리에서 이 사슬이 앞으로 어디로 끌려갈지를 내다보고 이 여행을 마치려 한다.
먼저 수요다. 2026년의 인공지능은 이미 일상에 스며들어, 처음의 충격은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에게 글과 코드를 맡기는 일을 전기 스위치만큼 당연하게 여긴다. 놀라움이 사라졌다는 건 흔히 성장이 끝났다는 신호로 읽히지만, 전기도 인터넷도 당연해진 바로 그때부터 세상을 바꿨다. 지금 잦아든 것은 첫 번째 물결, 언어를 다루는 물결의 충격일 뿐이다. 다음 물결들이 이미 수평선 위에 있다. 답을 주던 인공지능이 스스로 계획하고 일을 대신 하는 에이전트로, 언어에 갇혀 있던 것이 로봇의 몸을 얻어 육체노동으로, 아직 서툰 영상 생성으로, 그리고 새 약과 새 소재를 직접 찾아내는 발견으로. 이 물결들은 하나같이 웨이퍼를 더 굽게 만든다. 그러니 이 사슬의 밑바닥은, 물결이 바뀔 때마다 다시 바빠질 것이다.
다만 정직한 단서를 붙여야 한다. 이 물결들은 매끄러운 오르막이 아니라 띄엄띄엄 열리는 계단이고, 그 계단은 인공지능이 만든 값이 사람들의 지갑에서 실제로 걷혀 올 때만 다음 칸으로 올라선다. 여기 서늘한 역설이 하나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자리를 대신해 그만큼의 구매력까지 걷어 가 버리면, 정작 그 인공지능이 만든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얇아진다. 그래서 수요는 이상하게 갈라진다.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칩은 폭발하는데, 냉장고와 노트북과 자동차에 들어가는 소비자의 칩은 오히려 시드는 케이 자의 모양. 언어의 물결이 포화하고 다음 물결이 아직 돈을 걷지 못하는 그 사이의 골에서, 공장은 이미 다음 물결을 보고 지어 놨는데 수요가 따라오지 않으면 반도체의 오래된 역설이 고개를 든다. 부족해서 짓는데, 다 지어지는 순간 부족이 끝난다는 것.
흥미로운 건, 그 인공지능 시장 자체가 이 책의 명제를 그대로 되풀이한다는 점이다. 세계 최고 성능의 모델을 만드는 프론티어는 소수의 손에 집중되지만, 그 아래로 웬만큼 쓸 만한 모델은 공개되고 값이 거의 공짜로 떨어진다. 이익은 여기서도 가장 좁은 고리, 프론티어에만 잠깐 남고 그 아래는 상품이 된다. 반도체의 본딩과 EUV가 그랬듯이.
그리고 이 인공지능 회사들이 파는 건 실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인건비 그 자체다. 사람을 고용하는 대신 대리인을 돌리는 회사가 늘수록, 이들은 몇천억 달러짜리 소프트웨어 시장이 아니라 몇십조 달러짜리 노동시장을 겨눈다. 그 대체가 얼마나 빨리 올지를 나는 간단한 머신러닝 모델로 가늠해 봤는데, 답은 대략 이렇다. 인공지능의 노동 대체는 S곡선을 그리고, 가장 가파른 구간은 2030년대 초반이며, 그 곡선은 절반쯤에서 멈춘다. 판단과 손끝의 감각과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끝내 사람에게 남기 때문이다. 앞으로 십 년은 대체가 가장 빠른 십 년이 되겠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사라지는 십 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목줄은 이동한다 - 다음 10년
그리고 이 사슬 자체의 지도도 다시 그려진다. 값과 목줄은 고정된 자리가 아니라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십 년, 대략 네 방향으로 옮겨간다고 예상한다.
첫째, 선폭에서 패키징으로. 회로를 더 좁게 파는 싸움이 값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승부가 칩을 잘게 쪼개 쌓고 붙이는 쪽으로 넘어간다. 그래서 지금 인공지능 칩의 진짜 병목은 노광이 아니라 패키징 용량이고, 한국이 쥔 본딩이 마침 그 이동의 길목에 있다.
둘째, 칩 안에서 칩 밖으로. 이 병목은 곧 전력과 냉각으로 나간다. 가장 비싼 칩을 만들어도 꽂을 전기가 모자라는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규격품에서 맞춤복으로. 누구에게나 같은 값에 팔던 메모리가 고객마다 다른 맞춤형으로 바뀌면서, 이익이 선폭에서 시스템 통합으로 옮겨간다.
넷째, 하나의 사슬에서 진영별 사슬로. 수출통제와 국산화로 사슬이 쪼개지면, 선단은 더 소수에 집중되고 레거시는 중국발 과잉으로 값이 무너진다.
그래서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나
문과 비전문가가 상상하는 수준으로, 앞으로 반도체 산업의 변화 위에 한국의 자리를 냉정하게 놓으면, 할 일은 오히려 분명해진다. 쥔 고리는 더 깊게 쥔다. 메모리는 맞춤형과 첨단 패키징으로 벽을 높이고, 절반 되찾은 소재는 국산화를 더 밀어붙인다. 못 쥔 고리는 이기려 하지 말고 끊기지 않게 묶는다. EUV와 설계 도구는 만들 수 없으니, 동맹과 장기 계약으로 공급을 확보하는 게 현실적인 목표다. 밑에서 치고받는 중국과는 값 싸움으로 맞서지 말고 위로 피한다. 범용 메모리에서 원가로 겨루는 건 지는 게임이다.
그리고 이익이 새로 남기 시작하는 자리, 칩 밖의 전력과 냉각을 새 성장축으로 삼는다. 요컨대 한국의 전략은 자립이 아니라 편식이다. 이길 수 있는 고리에 몰아서 벽을 높이고, 못 이길 고리는 끊기지 않게 사 오는 것. 반도체를 다 가진 나라는 세계에 없고, 한국도 그럴 필요가 없다.
세 편에 걸쳐 나는 반도체 사슬을 위에서 아래까지 걸었고, 그 끝에서 사슬 전체가 향하는 인공지능의 미래까지 내다봤다. 그런데 이 모든 칩이 밤낮없이 돌아가려면, 결국 한 가지가 필요하다. 전기다. 그리고 그 전기가 지금 모자라기 시작했다. 다음 여행은, 오래도록 조연이던 전기의 사슬이 어떻게 갑자기 이 시대의 주연이 되었는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