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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 저니 · 2026-07-23

[밸류체인 저니-2] 반도체 ② 만드는 자리 — 신뢰의 벽과 날씨의 벽

대한민국 밸류체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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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편에서 나는 반도체 사슬의 맨 위, 상류를 정리해 보았다. 칩을 그리는 설계, 그 위에 바르는 소재, 회로를 새기는 장비, 한국이 약하거나 절반쯤 쥔 자리들이었다. 이제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간다. 그 설계도와 소재와 장비가 실제로 칩이 되는 자리, 제조의 중류다. 여기엔 큰 고리가 둘 있다. 남의 칩을 대신 찍어 주는 파운드리, 그리고 자기 칩을 직접 만드는 메모리.

돈으로 못 사는 벽 - 파운드리

먼저 파운드리는 한국이 20년을 두드린 벽이다. 삼성은 세계 최초로 GAA(게이트가 전류 통로를 사방에서 감싸 쥐어, 회로가 좁아져도 전류가 새지 않게 잡아 주는 차세대 트랜지스터 구조)를 3nm에 넣었고, 돈도 사람도 쏟아부었다. 그런데도 TSMC와의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벌어져, 2025년 3분기 점유율은 6.8% 대 71%다. 왜일까. 파운드리는 남의 설계를 맡아 대신 찍어 주는 사업인데, 여기서 결정적인 건 기술만이 아니라 신뢰다. 애플이나 엔비디아 같은 큰 손님은 자기 회사의 목숨인 설계도를, 메모리도 스마트폰도 직접 만드는 삼성에 선뜻 맡기지 못한다. 오늘의 고객이 내일의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TSMC는 우리는 고객과 절대 경쟁하지 않는다는 순수 파운드리 원칙 하나로 그 신뢰를 쌓아 세계를 얻었다. 삼성이 아무리 좋은 공정을 내놔도 넘기 어려운 건, 공정이 아니라 이 중립이라는 벽이다.

그런데 파운드리라고 다 이익을 못 부르는 건 아니다. 국내에서 이 사업을 하는 또 다른 회사, DB하이텍을 보면 그림이 뒤집힌다. 이 회사는 최첨단이 아니라 8인치 웨이퍼의 성숙한 공정(최첨단은 아니지만 오래 검증돼 안정된 공정)을 맡는데, 2025년 영업이익률이 20%에 가깝다. 최첨단 경쟁에서 비켜서서 남들이 잘 안 하는 성숙 공정을 지키면, 오히려 돈이 남는 것이다. 삼성이 최첨단에서 신뢰의 벽에 막혀 6.8%에 머무는 것과는 정반대의 자리다.

DB하이텍이 정확히 무엇을 만들어 누구에게 파는지 들여다보면, 이 회사가 왜 값을 지키는지가 더 또렷해진다. 자기 브랜드의 칩을 파는 게 아니라, 전 세계 180곳이 넘는 설계 회사의 주문을 받아 그들의 칩을 대신 구워 준다. 가장 큰 몫은 전력반도체다. 전기를 필요한 만큼 나눠 주고 끊어 주는 칩(전력관리반도체·PMIC 등)이 매출의 70%가량이다. 그다음이 화면의 픽셀을 켜는 디스플레이 구동칩(11%), 아날로그와 디지털 신호를 오가는 혼합신호 칩(8%) 순이다.

쓰임새로 보면 가전 같은 소비자용이 절반, 공장 설비의 산업용이 18%, 자동차용이 12%다. 손님으로는 삼성전자와 대만 미디어텍, 국내 LX세미콘 같은 이름난 설계사가 줄줄이 있고, 화면칩 큰손인 중국 BOE와 TCL도 있다. 그래서 매출의 80% 안팎이 수출이고, 그중 중국 비중이 60%를 넘는다. 성숙 공정에서 값을 스스로 지키는 대신, 경기와 중국 수요에 따라 실적이 출렁이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파운드리살아남는 포지셔닝매출영업이익영업이익률순이익
TSMC (세계 1위)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신뢰를 독점 - 세계 71%약 178조원약 90조원50.8%약 80조원
삼성전자 파운드리 (세계 2위)세계 2위 최첨단 공정, 신뢰의 벽에 막혀 적자 - 테슬라 수주로 반등 시도약 18조원 (추정)적자 (비메모리 -6조)적자별도 미공시
DB하이텍 (8인치 성숙공정)최첨단을 비켜 성숙 공정을 지켜, 값을 스스로 지킨다1조 3,972억2,773억약 19.8%2,526억

※ FY2025 연결 기준. DB하이텍은 DART 실제값이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를 별도 실적으로 공시하지 않아, 위 삼성 수치는 증권가 추정치다. 파운드리와 시스템LSI를 합친 비메모리 부문의 2025년 영업손실은 약 6조 원으로 알려졌고, 하반기 들어 분기 1조 원 미만으로 좁혀지는 중이다. 삼성 파운드리 단독 매출은 증권가(트렌드포스)의 분기별 추정치를 더한 어림값으로 2025년 약 126억 달러다. 2025년 3분기 파운드리 세계 점유율은 삼성 6.8%, 1위 TSMC 71%. TSMC는 2025년 연결 실적($122.4B·순이익 $55.2B)을 1달러=1,450원으로 환산했다.

2026년의 자리에서 몇 가지는 덧붙여 둔다. 삼성은 2025년 미국 텍사스 테일러 공장에서 2나노 GAA 양산에 들어갔다. 그해 7월에는 테슬라와 165억 달러(약 24조 원) 규모의 차세대 인공지능 칩(AI6) 위탁생산 계약을 따냈다. 이어 그 앞 세대인 AI5 물량까지 확보했다.

오래도록 삼성에 큰 칩을 안 맡기던 명단에도 조금씩 변화가 보인다. 구글은 자체 인공지능 칩 텐서(구글이 데이터센터용으로 직접 만든 TPU 계열)를 삼성에 맡겨 왔고, 인공지능 반도체 스타트업 그록(Groq)의 언어처리 특화 칩(LPU)도 삼성이 굽는다. TSMC의 공장이 빠듯해지자 AMD·구글·테슬라 같은 이름이 삼성 파운드리를 대안으로 저울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숫자로도 회복의 기미가 잡힌다. 2025년 하반기 60%이던 공장 가동률이 2026년 1분기엔 80%까지 올랐고,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를 합쳐 2025년 6조 원에 이르던 영업손실도 하반기 들어 분기 1조 원 미만으로 좁혀졌다. 실제로 2026년 6월에는 파운드리 부문이 3년 만에 처음으로 월 단위 흑자를 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4나노 공정 수율이 80%대로 회복된 덕이다.

다만 아직 벽은 남아 있다. 최첨단 2나노 GAA는 2025년 4분기 양산에 들어갔지만 수율이 50~60%대에 머물러, 퀄컴 같은 최상위 고객을 확실히 끌어오기엔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물량이 실제 이익으로 돌아오는 건 양산이 본격화하는 2027년 이후라, 조 단위 적자를 이어 온 파운드리 부문이 정말 흑자로 돌아설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그사이 국내 8인치 파운드리 지형도 움직였다. 8인치 전문 파운드리이던 키파운드리는 SK하이닉스가 2022년 인수해, 2024년 SK키파운드리로 이름을 바꿔 자회사로 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 회사와 기존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아이씨를 두 축으로, DB하이텍과 같은 8인치 성숙 공정(전력관리칩·디스플레이 구동칩 등)에서 파운드리를 한다. 그런데 이 SK키파운드리의 성적표가, 같은 8인치라도 회사에 따라 값을 지키는 힘이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반도체 호황이던 2022년엔 매출 8,430억 원에 영업이익 2,333억 원, 27%에 이르는 두꺼운 마진을 냈다. 그런데 이듬해 불황이 닥치자 매출이 5,221억 원으로 38% 주저앉고, 곧장 672억 원의 영업손실로 적자 전환했다. 앞서 본 DB하이텍이 같은 불황을 지나면서도 흑자를 지킨 것과는 대비되는 대목이다. 성숙 공정이라고 다 돈이 남는 게 아니라, 어떤 고객과 어떤 제품으로 그 자리를 지키느냐가 흑자와 적자를 가른다. 다만 이들은 모두 SK하이닉스 안에 묶인 비상장 사업이라, 순수 파운드리로 홀로 상장돼 실적이 낱낱이 드러나는 회사는 여전히 DB하이텍뿐이다.

이 세 회사를 한 판에 놓고 보면, 파운드리라는 사업이 어떻게 갈리는지가 데이터로 드러난다.

구분TSMC삼성전자 파운드리DB하이텍
세계 파운드리 점유율71%6.8%8인치 특화(순위 밖)
최선단 공정2나노 양산2나노 양산(수율 50~60%대)성숙 공정(아날로그·파워)
대표 고객애플·엔비디아·AMD테슬라·구글·Groq (AMD 등 협의)팹리스 180곳·중국 BOE
영업이익률50.8%적자(추정)19.8%

※ 2025년 기준. 자료는 각 사 공시.

세 회사를 한 판에 놓으면 간극이 숫자로 드러난다. 매출로 보면 TSMC는 약 178조 원, 삼성 파운드리는 그 8분의 1, DB하이텍은 다시 그 15분의 1이다. 그런데 값이 남는 순서는 매출 순서와 다르다. TSMC는 매출의 절반(50.8%)을 이익으로 남기고, DB하이텍은 5분의 1(19.8%)을 남기는데, 그 사이에 낀 삼성은 세계 2위 공정을 갖고도 적자다. 규모가 곧 이익이 아니라는 뜻이다.

TSMC와 삼성의 간극은 공정 기술이 아니다. 둘 다 2나노를 양산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간극은 신뢰다.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애플과 엔비디아를 다 담아 71%를 쥐었고, 삼성은 같은 2나노를 갖고도 그 명단을 채우지 못해, 적자를 감수하며 테슬라 한 곳을 어렵게 따냈다.

반대로 삼성과 DB하이텍의 간극은 방향의 차이다. 삼성이 못 넘는 벽(최첨단·신뢰)을 DB하이텍은 아예 넘으려 하지 않는다. 8인치 성숙 공정이라는, 남이 비운 자리로 비켜서서 20%의 값을 조용히 지킨다. 최첨단에서 적자를 보느니 낡았지만 비어 있는 자리에서 흑자를 보는 편이 낫다는 계산이다.

파운드리 한 사람이 남기는 것

이 간극은 사람 한 명이 남기는 값에서 가장 잔인하게 벌어진다. 순수 파운드리 두 곳, TSMC와 DB하이텍을 나란히 놓아 본다.

회사직원수평균 연봉1인당 매출1인당 영업이익
TSMC90,557명약 1억 5천만(추정)약 19.6억약 10.0억
삼성전자 파운드리별도 미공시약 1억 5,800만*산출 불가마이너스(적자)
DB하이텍2,221명약 9,320만약 6.3억약 1.2억

※ TSMC는 2025년 연결 실적을 1달러=1,450원으로 환산(매출 약 178조·영업이익 약 90조), 평균 연봉은 대만 공시(비관리직 평균)를 환산한 추정치다. DB하이텍은 DART 실제값. 1인당은 연매출·영업이익을 직원수로 나눈 값.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인력을 별도로 공시하지 않아 직원수와 1인당 매출을 낼 수 없다(표의 평균 연봉 1억 5,800만 원은 별표 표시로, 삼성전자 회사 전체 기준이다). 부문이 적자라 1인당 영업이익은 마이너스다. 참고로 삼성 반도체(DS) 전체 인력은 약 7만 8천 명, 삼성전자 전체는 약 16만 6천 명이지만, 여기서 메모리·시스템LSI를 뺀 파운드리 단독 인원은 회사가 공개하지 않는다.

TSMC의 직원 한 명은 한 해 10억 원 남짓을 영업이익으로 남긴다. DB하이텍의 여덟 배다. 같은 파운드리라는 이름을 달고도, 세계 71%를 쥔 회사의 사람과 8인치 틈새를 지키는 회사의 사람은 남기는 값이 자릿수부터 다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삼성의 사람은, 세계 2위 공정을 돌리면서도 회사가 적자인 탓에 남기는 값이 아직 마이너스다. 참고로, 2026년 SK하이닉스의 1인당 영업이익은 60~70억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흠.

세계를 쥐었으나 날씨에 묶인 - 메모리

중류의 다른 한 고리, 메모리는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리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D램(컴퓨터의 기억을 담는 대표 메모리)의 대부분을 만들고, 인공지능용으로 여러 층 쌓아 올린 HBM(고성능 메모리)은 두 회사가 열에 여섯 이상을 만든다. 메모리라는 벽이 어떻게 세워졌고 왜 쉽게 무너지지 않는지는 이 책의 다른 장, 기술이 세운 다섯째 벽에서 자세히 걸었다.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그 편을 펼쳐 보시길 권하고, 여기서는 중류의 지형을 마무리하기 위해 한 가지만 짚는다.

SK하이닉스의 2025년 영업이익률은 48.6%, 2026년 1분기엔 72%까지 치솟았다. 제조업의 역사에서 좀처럼 본 적 없는 숫자다. 그런데 이 마진은 벽이 아니라 날씨가 만든 것이다. 인공지능 호황이라는 유난히 좋은 날씨가 값을 밀어 올린 것이지, 두 회사가 값을 스스로 불러서가 아니다. 날씨가 바뀌면 이 봉투는 언제든 다시 얇아지고, 실제로 2023년 이 회사는 분기마다 조 단위 적자를 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벽이되, 그 높이를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벽. 그것이 메모리다.

한쪽은 백화점, 한쪽은 전문점

메모리라는 벽의 안쪽 풍경은 다섯째 벽 편에 맡기고, 여기서는 두 회사를 기업으로서, 무엇을 팔아 이 돈을 벌고, 곳간은 얼마나 튼튼한지 뜯어본다. 같은 메모리 강국의 두 대표지만, 회사의 생김새는 정반대다.

회사매출영업이익사업 구성설비투자
삼성전자333조 6,059억43조 6,011억반도체(DS)·가전모바일(DX)·디스플레이(SDC)·전장(하만)반도체 47.5조
SK하이닉스97조 1,467억47조 2,063억사실상 메모리 단일(D램+낸드)30조+

※ FY2025 연결(DART·각 사 공시). 삼성전자 매출·영업이익은 회사 전체, SK하이닉스는 사실상 메모리 단일이다. 삼성 설비투자는 반도체(DS) 기준 47.5조, 디스플레이까지 더하면 더 커진다.

삼성전자는 종합전자다. 2026년 기준으로 하면 거진 10배는 차이가 나겠지만, 2025년 기준으로 돌아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회사 전체 매출 333조 원 가운데 반도체는 한 축일 뿐이고, 스마트폰과 가전(DX), 디스플레이(SDC), 자동차 전장(하만)이 나머지를 채운다. 다만 돈을 버는 건 사실상 반도체다. 스마트폰과 가전과 디스플레이를 다 합쳐도, 회사 이익의 절반을 훌쩍 넘는 몫이 반도체 부문에서 나온다(삼성 반도체가 구체적으로 얼마를 벌었는지는 다섯째 벽 편에서 다뤘다). 즉 매출은 여러 다리로 서 있지만 이익은 반도체 한 다리에 실린 회사다. 이 구조는 양날이다. 메모리 겨울이 오면 가전·모바일이 회사를 얼마간 떠받치지만, 지금 같은 메모리 호황의 열매도 다른 사업의 부진에 얼마쯤 희석된다.

SK하이닉스는 정반대다. 매출 97조가 거의 전부 메모리, 곧 D램과 낸드에서 나온다. 완충 장치가 없는 순수 메모리 회사라 사이클을 정면으로 맞는다. 2023년 조 단위 적자를 낸 것도, 2025년 47조를 번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데 이 집중이 지금은 강점으로 작동한다. 이 회사의 D램 매출 가운데 44%,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이 인공지능용 HBM에서 나오는데, 종합전자가 아니라 메모리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이 호황을 온전히 이익으로 가져간다. 곳간도 몰라보게 튼튼해졌다. 2026년 1분기 기준 현금이 차입금을 35조 원가량 웃도는 순현금 상태로, 조 단위 적자에 시달리던 몇 해 전과는 딴 회사가 됐다. 그리고 올해 현금이 여기도 전년대비 10배는 더 쌓이지 않을까 싶다.

호황과 불황은 왜 되풀이되나

메모리가 왜 날씨에 휘둘리는지는, 지난 8년의 숫자를 세워 놓으면 한눈에 보인다. 순수 메모리 회사인 SK하이닉스의 연간 영업이익이다.

연도SK하이닉스 영업이익국면
201820.8조슈퍼사이클 정점
20192.7조폭락
202112.4조회복
20226.8조둔화
2023-7.7조대폭락(적자)
202423.5조HBM 반등
202547.2조HBM 슈퍼사이클

※ SK하이닉스 연결 영업이익(DART). 순수 메모리 회사라 메모리 업황의 진폭이 그대로 드러난다.

진폭이 무섭다. 2018년 21조를 벌던 회사가 이듬해 2.7조로 8분의 1 토막이 났고, 2021년 12조를 벌다 2023년엔 8조 가까운 적자로 곤두박질쳤다. 왜 이렇게 출렁였나. D램이 쌀 같은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만들어도 규격이 같으니 값으로만 경쟁하고, 시세는 현물시장에서 매일 춤을 췄다. 공급이 조금만 넘쳐도 값이 무너지고, 모자라면 폭등했다. 반도체가 호황과 불황을 되풀이하는 산업이라 불린 이유다.

그런데 지금, 이 진폭을 누르는 장치가 하나 생겼다. 장기공급계약(LTA)이다. 인공지능용 HBM은 고객마다 속을 다르게 맞추는 주문품이라, 현물시장에서 그날그날 값이 매겨지는 대신 고객과 몇 년치 물량과 가격을 미리 계약서에 못 박는다. 실제로 두 회사는 2026년 팔 물건을 이미 2025년에 대부분 계약으로 채웠고, 오픈AI는 두 회사에 다달이 웨이퍼 90만 장어치를 달라는 계획서를 내밀었다. 지금 만들 수 있는 양의 두 배가 넘는다. 값이 매일 춤추던 상품이, 몇 년짜리 계약서로 묶인 예약제가 된 것이다.

데이터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두 가지를 바꾼다.

첫째, 매출의 예측 가능성이 올라간다. 다음 해 얼마를 팔지가 연초에 이미 계약서에 적혀 있으니, 저 8분의 1 토막 같은 급락의 골이 얕아진다.

둘째, 그 대신 고객에 묶인다. 규격품 시절엔 누구에게나 팔 수 있었지만, 맞춤품은 치수를 맡긴 고객이 발을 빼면 그 물량이 통째로 빈다. 사이클의 진폭을 줄인 대가로, 몇몇 큰 고객의 계획에 회사의 운명을 거는 셈이다. 그러니 LTA가 사이클을 없앤 것은 아니다.

매일의 현물 사이클을 몇 년 단위의 계약 사이클로 바꿔 끼웠을 뿐이고, 그 계약의 바탕에 깔린 인공지능 수요가 꺾이는 날 진폭은 다시, 이번엔 더 큰 단위로 돌아올 수 있다. 다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데이터는, 이번 호황이 과거처럼 1~2년 만에 고꾸라지지는 않을 근거 하나를 쥐여 준다.

파운드리와 메모리는 한 몸이 되어 간다

마지막으로, 이 편에서 따로 떼어 놓은 두 고리, 파운드리와 메모리가 실은 점점 한 몸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야겠다. 원래 이 둘은 다른 시장이었다. 파운드리는 남의 칩을 대신 굽는 서비스업이고, 메모리는 자기 규격품을 찍어 파는 제조업이라 사는 사람도 파는 방식도 달랐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 경계를 지우기 시작했다.

이전에 다뤘던 내용을 다시 집고 넘어가면서 설명을 하자면, 역시 판을 뒤집은 그 접점은 HBM이다. 곧이어 하류 편에서 볼 6세대 HBM(HBM4)부터, 층층이 쌓은 D램의 맨 아래에서 전체를 지휘하는 베이스 다이가 메모리 공정이 아니라 파운드리 공정으로 만들어진다. 고객마다 다른 기능을 새겨 넣어야 해서, 시스템반도체를 굽는 파운드리의 손이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SK하이닉스는 이 바닥 원단을 대만 TSMC에 맡기고, 삼성은 자기 파운드리의 4나노 공정으로 직접 만든다. 메모리 회사가 파운드리의 고객이 되는, 몇 해 전이라면 낯설었을 그림이다.

여기에 두 시장을 같은 방향으로 미는 힘이 하나 더 있다. 같은 인공지능 수요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칩(파운드리가 굽는다)과 그 옆에 붙는 HBM(메모리가 만든다)은 한 세트로만 팔린다. 그 둘을 하나의 판에 얹어 붙이는 첨단 패키징(TSMC의 CoWoS 같은 기술)이 지금 인공지능 칩의 진짜 병목인데, 바로 이 자리에서 파운드리와 메모리와 패키징이 한 작업대 위에 모인다.

그런데 이 인공지능 수요의 정체를 한 겹 더 벗겨 보면, 맨 끝에 하이퍼스케일러라 불리는 소수의 거인이 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처럼 세계에서 가장 큰 데이터센터를 굴리는 회사들인데, 서버 수십만 대를 필요에 따라 늘렸다 줄였다 하는 초대형 인프라를 운영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엔비디아의 그래픽칩도, 그 옆에 붙는 HBM도, 결국 세상에서 이들이 가장 많이 사들인다. 앞서 오픈AI가 두 메모리 회사에 월 90만 장을 달라고 한 것도 이 급의 수요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엔비디아에만 기대지 않으려고, 자기 데이터센터 전용 칩까지 직접 그리기 시작했다. 구글의 텐서(TPU), 아마존의 트레이니엄, 마이크로소프트의 마이아가 그것이고, 이 칩들을 TSMC와 삼성 파운드리에 맡긴다. 그러니까 하이퍼스케일러는 이 사슬의 맨 끝에서 GPU와 HBM과 파운드리 물량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최종 수요처이자, 스스로 파운드리의 큰 고객이 되기 시작한 존재다. 파운드리와 메모리를 한 방향으로 미는 그 힘의 정체가, 바로 이들이다.

이 지점에서 삼성의 자리가 묘해진다. 세계에서 메모리와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을 한 회사가 다 가진 곳은 삼성뿐이다. 이론대로라면 HBM을 통짜로 만들어 넘기는 턴키가 가능하고, 그것이 삼성의 오랜 꿈이다. 그런데 앞서 본 신뢰의 벽이 여기서도 발목을 잡는다.

고객은 삼성에 전부를 맡기기보다, 메모리는 하이닉스에서 사고 파운드리는 TSMC에 맡기는 쪽을 택한다. 실제로 삼성은 더 많은 고객을 잡으려 파운드리 경쟁자인 TSMC와 HBM4에서 손잡는 방안까지 저울질했다. 다 가졌는데 그 전부를 팔지는 못하는 것. 파운드리에서 삼성이 겪던 역설이, 두 시장이 붙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되풀이된다.

파운드리에서 한국은 세계 최고 공정을 갖고도 신뢰의 벽에 막혀 값을 못 부르고, 메모리에서는 세계를 쥐고도 그 값을 날씨에 맡긴다. 하나는 구조에 막히고, 하나는 사이클에 흔들린다. 그런데 바로 그 메모리를 인공지능용으로 쌓아 올리는 맨 끝의 고리 하나에서는, 이익의 향방이 날씨가 아니라 구조로 정해진다. 아무도 그 조립을 대신할 수 없어서다.

사슬의 가장 아래, 가장 좁은 자리다. 마지막 걸음은 거기로 내려가서, 그 좁은 고리를 지나 이 사슬 전체가 결국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까지 내다본다.

글은 서사를 맡고, 숫자는 플랫폼이 맡습니다. 이 글의 산업을 데이터로 이어서 보려면 — 반도체 밸류체인 지도 · 저평가 스크리너 · Value-chain Analy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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