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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류체인 저니 · 2026-07-18

[밸류체인 저니-2] 반도체 ① 값을 만드는 상류는 아직 남의 손 — 설계·소재·장비

대한민국 밸류체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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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오래된 컴퓨터에서 뽑아 둔 램 하나를 찾았다. 자 처럼 길고 얇은 한 초록색 기판에 검은 칩이 가지런히 붙어 있는 물건. 나는 그걸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물건이 바로 이것의 먼 후손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돌리는 반도체. 이 물건을 손에 쥐고 사슬을 거슬러 오르면, 돈이 남는 자리가 어디까지 좁아질 수 있는지가 보인다.

그런데 그 전에, 반도체라는 사슬이 얼마나 긴지부터 봐야 한다. 이건 한 회사가 모래에서 칩까지 통째로 만드는 물건이 아니라, 수십 개의 좁은 고리가 사슬처럼 이어진 것이고, 고리마다 값을 쥔 주인이 다르다. 그래서 이번 반도체 여행은 세 편에 걸쳐, 전체 지도를 먼저 펼친 다음 맨 위 상류에서 아래 하류까지 한 단계씩 내려간다. 거칠게 늘어놓으면 이렇다.

사슬의 고리값을 쥔 곳한국의 자리
설계 (칩을 그린다)엔비디아·퀄컴 (미국)미약 - LX세미콘·제주반도체 - AP도전자 퓨리오사AI·리벨리온
설계도구·IP시높시스·케이던스(미)·ARM(영)거의 없음
핵심 소재 (감광액·특수가스)신에쓰·JSR (일본)절반 - 동진쎄미켐·솔브레인·한솔케미칼
노광 장비 (EUV)ASML (네덜란드) 독점없음
장비 (증착·식각·검사)AMAT·램리서치(미)·도쿄일렉트론(일)·KLA(미)일부 국산화 원익IPS·주성엔지니어링·넥스틴·파크시스템스
위탁생산 (파운드리)TSMC (대만)삼성 2위, DB하이텍
메모리 (D램·낸드)삼성·SK하이닉스 (한국)세계 지배
후공정·본딩 (쌓아 붙이기)한미반도체 (한국)강함 - 한미반도체·리노공업

표에는 낯선 이름이 여럿 보인다. 뒤에서 하나씩 다시 만나겠지만, 무엇을 하는 회사들인지 미리 한 줄씩만 짚어 둔다. 설계의 LX세미콘은 화면을 켜는 칩을 만든다. 소재의 동진쎄미켐·솔브레인·한솔케미칼은 웨이퍼(반도체를 새기는 둥근 실리콘 판)에 바르고 씻는 화학을 맡는다. 장비의 원익IPS·HPSP·이오테크닉스는 그 웨이퍼를 굽고 깎고 다루는 기계를 만든다. 이름은 낯설어도,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화면과 메모리가 이 회사들의 손을 한 번씩 거쳐 간다.

한눈에 드러나는 게 있다. 이 긴 사슬의 앞쪽, 상류 고리 대부분을 미국·네덜란드·일본이 하나씩 나눠 쥐고 있다는 것이다. 칩을 그리는 머리도, 회로를 새기는 노광 장비도, 그 위에 바르는 핵심 소재도 오래도록 우리 것이 아니었다. 한국이 확실히 쥔 고리는 아래쪽에 몰려 있다. D램과 낸드(컴퓨터의 기억을 담는 칩)를 만드는 메모리, 그리고 그 메모리를 인공지능용으로 쌓아 올리는 맨 끝의 본딩이다.

값이 이 고리들을 따라 어떻게 흐르는지는, 회사들의 성적표를 위에서 아래로 늘어놓아 보면 잔인할 만큼 분명해진다.

사슬 위치대표사매출영업이익영업이익률순이익
메모리 (한국 지배)SK하이닉스97조원47조 2천억48.6%42조 9천억
본딩 장비한미반도체5,767억2,514억약 43.6%2,140억
핵심 소재한솔케미칼8,840억1,562억17.7%1,481억
설계 (팹리스)LX세미콘1조 6,391억1,089억6.6%826억
후공정 (패키징)SFA반도체3,674억-196억-5.3%-191억

※ FY2025 기준. 각 고리를 대표하는 한 회사만 골랐다. SK하이닉스의 마진은 HBM 초호황이 만든 것이고, SFA반도체는 2025년 영업적자였다

표를 위에서 아래로 훑으면, 돈이 어디에 남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40%를 넘는 두 자리는 메모리와 본딩이고, 그 아래로 소재는 그 절반, 설계는 다시 그 아래, 사슬 맨 끝의 후공정 조립은 아예 적자다. 돈은 사슬을 따라 고르게 흐르지 않는다. 대체 불가능한 좁은 고리 몇 곳에만 많이 남고, 나머지 자리에서는 흔적도 없이 얇아진다. 이 책이 줄곧 물어 온 질문. ‘돈을 스스로 부를 수 있는가’ 의 답이, 자리마다 이렇게 층층이 갈린다. 그리고 그 답을 가르는 것은 회사의 덩치가 아니라, 그 회사가 사슬의 어느 자리에 어떻게 서 있느냐. 포지셔닝이다.

돈이 가장 많이 남는 메모리는 이 책의 다른 장, 기술이 세운 다섯째 벽에서 이미 깊이 걸었다. 그래서 이 반도체 여행은 메모리를 건너뛰고, 그 벽을 떠받치거나 그 벽에 얹힌 나머지 고리들을 위에서 아래로 훑는다. 이번 편은 사슬의 맨 위, 상류다.

상류 - 한국이 가장 약한 자리

반도체 사슬의 맨 위에는 세 고리가 있다. 칩을 그리는 설계, 그 칩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소재, 그리고 장비. 공교롭게도 여기가 한국이 가장 약하거나, 겨우 절반을 쥔 자리들이다.

먼저 설계다. 칩을 그리는 팹리스(공장 없이 설계만 하고 제조는 파운드리에 맡기는 회사)는 돈이 가장 많이 남아야 할 자리다. 엔비디아를 보라. 공장 하나 없이 설계만으로 세계 최고 기업이 됐다. 그런데 한국의 팹리스는 세계 시장에서 비중이 3%에 그친다. 대표 주자가 LX세미콘과 제주반도체인데, 무엇을 그리는 곳인지부터 짚어 두자.

LX세미콘(옛 실리콘웍스, 엘지에서 갈라져 나온 엘엑스그룹 계열)은 화면을 켜는 칩을 그린다. 스마트폰과 티브이 화면의 수백만 개 픽셀 하나하나에 어떤 색과 밝기를 낼지 신호를 쏘아 주는 디스플레이 구동칩이 그것이고, 주 고객은 엘지디스플레이다.

제주반도체는 삼성과 에스케이가 대량으로 찍는 큰 메모리 말고, 사물인터넷 기기나 통신장비에 들어가는 소용량 메모리를 설계해 파는 틈새 회사다. 둘 다 설계를 하지만, 세계가 큰돈을 버는 그 설계, 인공지능 칩이나 스마트폰의 두뇌 노릇을 하는 AP는 아니다.

두뇌 칩의 이름들

여기서 잠깐, 이 두뇌 칩들의 이름을 정리하고 가자.

컴퓨터의 일을 도맡는 가장 기본이 CPU인데, 한 번에 하나씩 순서대로 처리하는 만능 일꾼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같은 곱셈을 수백만 번 동시에 해야 해서, 작은 계산기 수천 개를 깔아 한꺼번에 병렬로 돌리는 칩이 따로 필요해졌다.

그게 원래 게임 화면을 그리려고 태어났다가 인공지능의 주력이 된 GPU(그래픽 처리 장치)이고, 엔비디아가 세계를 쥔 바로 그 물건이다.

거기서 인공지능 계산만 더 잘하도록 군더더기를 덜어낸 것이 NPU이며, 구글이 자기 데이터센터를 돌리려고 직접 만든 같은 계열의 칩을 TPU라 부른다.

그리고 스마트폰 안에는 이 CPU와 GPU와 NPU에 통신 기능까지 한 칩에 몰아넣은 것이 들어가는데, 그것이 바로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다.

말하자면 AP는 손바닥 안의 작은 컴퓨터 한 대를 통째로 칩 하나에 담은 것이라, 여러 칩 가운데 설계 난이도가 가장 높은 축이다. 같은 설계라도 난이도는 자릿수로 갈린다. 화면칩은 픽셀에 정확한 전압을 내보내는 비교적 단순한 회로이지만, 그 AP는 수백억 개 트랜지스터가 들어찬 도시라, 최첨단 공정과 방대한 설계·검증·소프트웨어 생태계가 다 갖춰져야 겨우 만든다. 한국이 화면칩은 그리면서 AP는 못 그리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그 자릿수의 벽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화면칩과 틈새 메모리 언저리에 머문다. 대표 주자 LX세미콘의 2025년 영업이익률이 6.6%에 그치는 것도 그래서다. 설계를 하는데도 마진이 이렇게 얇은 건, 남의 표준과 남의 파운드리에 얹혀 부가가치의 얇은 층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값이 가장 커야 할 자리에서, 한국은 오히려 값을 못 부른다.

그래도 도전자는 나타났다

다만 2026년의 자리에서 한 가지는 덧붙여야 공정하다. 정작 값이 가장 큰 그 자리. 인공지능 칩 설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새 회사들이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다. 퓨리오사AI와 리벨리온이다.

퓨리오사AI는 인공지능 추론을 빠르고 적은 전력으로 처리하는 칩(레니게이드)을 그린다. 2025년 메타가 8억 달러 안팎에 인수하겠다고 나섰지만 거절하고 독자 노선을 택했다. 대신 산업은행이 주도하는 투자를 받아 그해 하반기 양산에 들어갔다.

리벨리온은 데이터센터에서 엔비디아 그래픽칩의 대안을 노리는 인공지능 추론용 칩을 그리는데, 2024년 에스케이텔레콤 계열의 같은 분야 회사 사피온과 합병해 몸집을 키우며 국내 대표 주자로 올라섰다.

딥엑스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쪽은 데이터센터가 아니라 로봇과 시시티브이와 가전 같은 기기 안에 직접 박혀, 인터넷에 연결하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인공지능을 돌리는 저전력 칩, 이른바 온디바이스 반도체을 만든다. 아직 이들 대부분이 비상장 스타트업이라 위 표에는 넣지 못했고, 적자를 감내하는 초기 단계이며 엔비디아에 견줄 규모도 아니다. 그러나 한국이 오래 발도 못 붙였다던 그 상류의 설계 고리에 처음으로 이름을 내밀기 시작한 시도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미약하다는 말의 뒤에, 작지만 새 문장이 하나 붙기 시작한 셈이다.

소재 - 2019년 여름이 남긴 것

다음은 소재다. 이 자리를 온 나라가 처음 실감한 건 2019년 여름이었다. 일본이 어느 날, 반도체 소재 세 가지, 회로 모양을 빛으로 찍어 내는 감광액(빛에 반응하는 특수 액체), 웨이퍼를 깎는 고순도 불화수소, 휘는 화면에 쓰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수출을 조이겠다고 통보했다. 세 가지 모두 한국이 일본에 90% 안팎을 기대던 물건이었다. 세계 메모리의 대부분을 만드는 나라가, 그 메모리에 바르는 액체 몇 통 때문에 공장을 멈출 뻔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은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규제가 국산화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솔브레인은 이듬해 초 순도가 소수점 아래 아홉이 넘게 붙는 초고순도 불화수소를 대량으로 만들어 냈고, 동진쎄미켐은 감광액을 국산화하며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극자외선용 감광액 개발사로 이름을 올렸다. 한솔케미칼은 D램과 HBM의 얇은 막을 입히는 재료인 전구체와, 웨이퍼를 씻는 초고순도 과산화수소로 그 곁을 지킨다. 목줄이 밖에 있던 소재의 자리에서, 한국은 절반쯤을 안으로 끌어온 셈이다.

장비 - 다섯 거인이 비운 틈새

마지막은 장비다. 웨이퍼 한 장이 칩이 되기까지 수백 번의 공정을 거치는데, 공정마다 다른 기계가 필요하다. 국내에도 그런 장비를 만드는 알토란 회사가 여럿이다.

원익IPS와 주성엔지니어링은 웨이퍼 위에 원자 몇 겹 두께의 얇은 막을 입히는 증착 장비를 만든다. 주성은 그 원자층 증착의 원천 특허를 쥐고 있다. 이오테크닉스는 칩에 레이저로 미세한 구멍을 뚫거나 이름을 새기는 레이저 장비를 만든다.

다만 여기서 정직하게 짚을 게 있다. 이 장비 시장의 진짜 주인은 국내 회사가 아니다. 웨이퍼에 원자층 막을 입히는 증착에서는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와 일본 도쿄일렉트론이, 패턴을 따라 웨이퍼를 깎아 내는 식각에서는 미국 램리서치와 도쿄일렉트론이 세계를 나눠 쥔다. 그리고 다 만든 회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결함이 없는지 들여다보는 검사·계측 장비는 미국 KLA가 사실상 독점하는데, 이 회사의 영업이익률은 세계 반도체 장비사 가운데 가장 높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노광의 ASML, 증착의 AMAT, 식각의 램리서치, 여기에 도쿄일렉트론과 KLA를 더한 이 다섯 회사가 세계 반도체 장비의 대부분을 나눠 갖는다. 원익IPS와 주성엔지니어링, 그리고 검사에 도전하는 넥스틴·파크시스템스가 그 거인들이 비운 틈새의 일부 공정을 파고들어 국산화를 넓혀 가고 있지만, 아직 이 시장을 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다섯 거인의 명단에서도 맨 꼭대기, 회로를 직접 새기는 EUV 노광기만큼은 한국이 지금도 손도 못 댄다. 여기서 손도 못 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과학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UV는 파장이 13.5나노미터인 극자외선인데, 이 빛을 만드는 방법부터가 비상식적이다. 주석 방울을 진공 속에 떨어뜨리고 거기에 초강력 레이저를 1초에 5만 번씩 쏴서 플라스마로 터뜨려야 그 빛이 겨우 나온다. 게다가 이 빛은 공기에도 유리에도 다 흡수돼 버려서 렌즈로 모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장비 안을 통째로 진공으로 비우고, 빛을 거울로 반사시켜 나른다.

그 거울은 독일 자이스가 만드는데, 원자 수준으로 매끄러워서 거울을 독일 땅만 하게 확대해도 요철이 손톱 두께에도 못 미쳐야 하는 정밀도다. 광원과 거울과 나노미터 단위로 움직이는 스테이지, 수십만 개의 부품과 수백 곳의 협력사가 30년을 쌓아 올린 이 통합 시스템을, 세계에서 오직 네덜란드 ASML 한 곳만 조립해 낸다. 소재는 여러 회사가 나눠 선 넓은 고리라 국산화의 방아쇠라도 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노광기는 다르다. 돈이 아니라 수십 년의 축적과 협력사 생태계 전체를 통째로 사야 넘는 벽이라, 통장에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하루아침에 지을 수가 없다. 무엇을 왜 못하느냐고 묻는다면, 답은 이것이다. 빛을 만드는 물리와, 그 물리를 다루는 30년의 손이 아직 우리에게 없다.

좁은 자리를 지키면 값을 부른다

이 상류에 선 국내 회사들을 2025년 성적표로 나란히 놓되, 이번엔 각 회사가 그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 포지셔닝까지 함께 적어 본다. 이 사슬을 읽는 진짜 열쇠가 바로 그 한 줄이기 때문이다.

고리회사살아남는 포지셔닝매출영업이익이익률순이익
장비HPSP고압 수소 어닐링 장비 세계 독점, 대체자가 없다1,730억899억52.0%727억
소재티씨케이SiC 링 세계 과점, 식각 소모품이라 바꾸기 어렵다3,013억839억27.8%699억
장비이오테크닉스레이저 마킹·드릴링 특화 니치, 남이 안 하는 자리3,809억808억21.2%576억
소재에스앤에스텍블랭크마스크 국산화, EUV 펠리클에 도전2,437억504억20.7%581억
장비파크시스템스원자현미경 계측 세계권, 나노 측정의 좁은 자리2,056억422억20.5%345억
소재한솔케미칼전구체·과산화수소, HBM 고단화 수혜의 좁은 고리8,840억1,562억17.7%1,481억
장비케이씨텍CMP 장비·슬러리 국산화, 소재까지 겸함3,829억600억15.7%534억
소재솔브레인12나인 초고순도 불화수소, 2019년 목줄을 끊었다9,234억1,336억14.5%840억
소재동진쎄미켐EUV 감광액 국산화 유일, 일본 과점을 뚫었다1조 1,941억1,724억14.4%941억
장비주성엔지니어링ALD 원천특허 보유, 증착 장비 니치3,107억313억10.1%357억
장비원익IPS증착(CVD·ALD) 국산 1위, 삼성에 밀착9,098억738억8.1%약 830억
설계LX세미콘디스플레이 구동칩 특화, 남의 표준에 얹혀 있다1조 6,391억1,089억6.6%826억
소재원익QnC쿼츠·세라믹 소모품, 규모는 크나 값은 얇다9,436억596억6.3%10억
소재후성반도체 특수가스·냉매, 원가로 버티는 사업4,716억253억5.4%70억

※ FY2025 기준(HPSP·티씨케이·리노 계열 등 일부는 별도, 나머지 연결). 원익IPS 순이익은 세전이익 기준 어림값. 소재사 매출엔 디스플레이·2차전지용 소재가 함께 잡힌다.

이 표는 위에서 아래로 그대로 포지셔닝의 사다리다.

맨 위 HPSP는 고압 수소 어닐링이라는 장비를 세계에서 사실상 혼자 만든다. GAA나 FinFET 같은 최첨단 칩을 만들 때, 칩이 타지 않게 저온에서 고압 수소 기체를 찔러 넣어 내부 결함을 치료하는 기술이다. 반도체가 10나노 이하(3나노, 2나노 등)의 초미세 공정으로 들어서면서, 회로가 너무 얇아져 고온을 가하면 칩 자체가 녹거나 변형(손상)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HPSP는 “온도를 못 올린다면 압력을 올리자!”라는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아무도 대신 못 하니, 매출 1,730억짜리 작은 회사가 영업이익률 52%를 부른다.

그 아래 티씨케이의 SiC(탄화규소, 높은 열과 전압을 견디는 반도체 소재) 링, 파크시스템스의 원자현미경, 이오테크닉스의 레이저도 마찬가지다.

티씨케이는 웨이퍼를 깎아 내는 식각 장비 안에서 웨이퍼를 받치고 감싸는 SiC(탄화규소) 링을 만든다. 공정을 한 번 돌릴 때마다 조금씩 깎여 나가 주기적으로 갈아 끼워야 하는 소모품인데, 이걸 세계에서 이 회사와 손에 꼽는 몇 곳만 만들어서, 한번 라인에 들어가면 장비가 도는 내내 다시 사 줄 수밖에 없다.

파크시스템스는 원자 하나 크기의 높낮이까지 더듬어 재는 원자현미경(뾰족한 바늘로 표면을 훑어 나노 단위 요철을 읽는 계측기)을 만든다. 회로 선폭이 나노 단위로 좁아질수록 그 미세한 굴곡을 들여다볼 눈이 필요한데, 이 정밀 계측기를 만드는 회사가 세계에 몇 없다.

이오테크닉스는 앞서 봤듯 칩 표면에 레이저로 제품 이름을 새기고 미세한 구멍을 뚫는 레이저 장비를 만든다. 셋 다 몸집은 크지 않아도, 남이 못 하는 좁은 자리를 지키니 영업이익률이 20%대로 나온다.

반대로 맨 아래 원익QnC와 후성은 매출이 수천억에서 1조에 이르는데도 이익률이 5~6%에 그친다. 쿼츠와 특수가스는 여러 회사가 만들 수 있는 넓은 고리라, 규모로 버틸 뿐 값을 부르지 못한다.

원익QnC는 반도체를 고온에서 굽고 깎는 장비 안에서 웨이퍼를 담고 받치는 쿼츠(석영 유리) 부품을 만드는데, 티씨케이의 SiC 링과 마찬가지로 열에 시달려 주기적으로 갈아 끼워야 하는 소모품이다. 후성은 회로를 깎고 씻어 내는 데 쓰는 반도체용 특수가스, 그중에서도 다루기가 까다로운 불소계 가스를 만든다. 둘 다 없으면 라인이 멈추는 물건이지만, SiC 링과 달리 이 쿼츠와 가스는 만들 수 있는 회사가 여럿이라, 규모로 버틸 뿐 값을 부르지 못한다.

같은 상류에 서 있어도, 세계 독점이라는 포지셔닝을 쥔 회사와 원가로 버티는 회사의 운명은 이렇게 갈린다. 이 사다리를 다 합쳐도, 정작 이들이 못 만드는 EUV 노광기 한 대 값을 몇 대분 대는 데 그친다는 것이 상류의 서늘한 진실이지만.

봉투는 사슬의 자리를 안다

사슬의 자리가 사람의 봉투에도 그대로 찍히는지, 대표 회사 몇 곳의 사람 숫자를 들여다본다.

회사직원수평균 연봉평균 근속1인당 매출1인당 영업이익
HPSP127명약 1억 4,270만3.2년약 13.6억약 7.1억
티씨케이471명약 8,900만7.0년약 6.4억약 1.8억
이오테크닉스636명약 7,180만9.1년약 6.0억약 1.3억
에스앤에스텍311명약 5,890만5.7년약 7.8억약 1.6억
파크시스템스392명약 6,410만4.7년약 5.2억약 1.1억
한솔케미칼716명약 1억 2,100만9.1년약 12.4억약 2.2억
케이씨텍782명약 6,890만5.2년약 4.9억약 7,700만
솔브레인1,133명약 9,300만9.7년약 8.2억약 1.2억
동진쎄미켐1,469명약 8,300만8.8년약 8.1억약 1.2억
주성엔지니어링485명약 9,270만8.1년약 6.4억약 6,500만
원익IPS1,509명약 8,560만7.6년약 6.0억약 4,900만
LX세미콘1,417명약 9,770만6.5년약 11.6억약 7,700만
제주반도체139명약 9,310만8.6년약 21.7억약 2.6억
원익QnC1,212명공시 제한7.4년약 7.8억약 4,900만
후성351명약 8,730만10.8년약 13.4억약 7,200만

※ 각 사 2025년 사업보고서(별도, 남녀 가중평균). 1인당 매출·영업이익은 위 실적표의 매출·영업이익을 이 직원수로 나눈 어림값. HPSP는 인원이 적어 대략만, 원익QnC는 평균 급여를 사업보고서에 공시하지 않아 비웠다. 제주반도체는 공장 없이 설계만 하고 생산을 남에게 맡기는 팹리스라 사람 수가 적어 1인당 매출이 유난히 커 보인다.

세계 독점을 쥔 HPSP가 1억 4천만 원으로 가장 높고, 돈이 많이 남는 전구체의 한솔케미칼(1억 2천만 원)과 설계의 LX세미콘(9천만 원대)이 그 뒤를 잇는다. 돈이 남는 자리와 사람의 봉투는 대체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 사람이 벌어들이는 몫에서도 같은 그림이 보인다. 세계 독점의 HPSP는 직원 한 명이 영업이익 7억을 남기고, 전구체의 한솔케미칼도 2억을 넘는다.

반대로 넓은 고리에서 규모로 버티는 원익IPS나 원익QnC는 한 명이 남기는 이익이 5천만 원에도 못 미친다. 다만 여기까지가 상류의 지형이다. 한국이 못 쥐었거나(설계·EUV) 절반쯤 되찾은(소재) 자리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세계 독점이라는 좁은 포지셔닝을 쥔 몇몇만 값을 부르는 자리. 이 상류가 앞으로 훨씬 바빠질 이유가 하나 있는데, 인공지능이 웨이퍼를 더 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사슬의 맨 아래에 내려가서 다시 하기로 한다.

다음 걸음은 한 단계 아래, 이 설계도와 소재와 장비가 실제로 칩이 되는 자리, 파운드리와 메모리라는 제조의 중류다.

글은 서사를 맡고, 숫자는 플랫폼이 맡습니다. 이 글의 산업을 데이터로 이어서 보려면 — 반도체 밸류체인 지도 · 저평가 스크리너 · Value-chain Analy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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